[미디어 비평] AI와 영화산업

Phenaki 데모 영상. 출처 Google Research

짧은 애니메이션 한 편을 소개한다. 위 영상을 보자. 화려한 도시의 야경이 보인다. 그곳에 갑자기 우주선이 나타난다. 카메라는 우주선 내부로 빠르게 들어간다. 무언가 작업 중인 우주인을 보여주고 그 뒤로 보이는 수족관 속 물고기를 향해 간다. 카메라는 이내 수면 위로 올라간다. 저 멀리 도시가 보인다. 도시 속 빌딩을 향해 질주한다. 이런 식으로 미래 도시의 이미지들이 2분 동안 유영하듯 전개된다.

그런데 이 영상, 인간이 만든 게 아니다. 구글의 비디오 생성형 인공지능 페나키(Phenaki)가 지난해 10월 공개한 데모 영상 중 하나다. 다음과 같은 몇 줄의 글만으로 생성된 영상이다.

 

“미래 도시에 교통량이 많다”

“외계 우주선이 미래 도시에 도착했다”

“카메라가 외계 우주선 안으로 들어간다” (후략)

 

이와 같은 간단한 지시문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면, 페나키는 알아서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생성한다. 화질은 좋지 않고 소리는 없지만 이미지만큼은 꽤 그럴듯하다.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와 이미지 인공지능 ‘달리’(Dall-E)에 이어 영상을 만드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영상을 생성하는 인공지능은 페나키 외에도 런웨이의 ‘Gen-2’와 구글의 이미진(Imagen) 등이 있다. 모두 텍스트를 영상으로 만드는 이른바 ‘텍스트투비디오(Text-to-video)’ 인공지능이다. 이 인공지능들은 아직 대중에 공개되지 않아 직접 사용해볼 순 없지만, 작동방식은 데모영상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아래는 Gen-2의 데모 영상이다.

Gen-2 데모 영상. 출처 Runway

필자는 대학 때 영화학을 전공하며 단편 영화를 만든 경험이 있다. 영화 제작은 많은 인력과 시간, 비용이 투입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소규모 단편 영화를 만드는 데도 연출, 제작, 촬영, 조명, 미술, 녹음, 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가 필요했다. 시나리오와 로케이션 헌팅, 콘티 등 촬영의 밑그림을 준비하는 프리프로덕션, 본 촬영에 해당하는 프로덕션, 편집과 색 보정, 사운드 믹싱 등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포스트프로덕션까지 거쳐서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됐다. 서로 다른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이 내가 아는 영화 작업이었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그 생각에 균열을 냈다. 몇 줄의 지시문만으로 짜임새 있는 영상을 생성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제작의 중간 과정이 단숨에 생략됐다. 인공지능은 지시문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물론, 지시문에 담기지 않은 행간까지도 채워냈다. 영상을 생성하는 기술은 이미지를 생성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 이미지와 달리 영상은 시간의 흐름과 그에 수반하는 동작의 변화까지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딥러닝으로 무장한 인공지능은 이 높은 허들까지 뛰어넘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질문이 생긴다. 인공지능은 과연 영화 제작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을까?

‘영화 제작자’ 인공지능의 가능성

영화는 스토리텔링에서 시작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은 이미 시도되고 있다. 온라인 서점 ‘Yes24’는 지난달 27일 7명의 작가가 챗GPT와 협력하여 완성한 SF 단편소설집 <매니페스토>를 공개했다. 인공지능이 얼마나 완성된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시도였다. 작가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챗GPT와 협력해 총 7편의 단편을 완성했다. 챗GPT에게 이야기의 소재와 구조 등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아예 특정 소재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는 등 전권을 맡기기도 했다.

'그리움과 꿈' 협업일지. 출처 네오픽션
'그리움과 꿈' 협업일지. 출처 네오픽션

‘그리움과 꿈’의 오소영 작가는 “명령어만으로 소설을 완성해가는 챗GPT의 능력은 충분히 놀라웠다”고 했다. 챗GPT는 아직 장편 소설까지 쓰진 못한다. 오소영 작가는 챗GPT가 짧은 문장을 생성하면, 그 이후의 이야기를 되물어가는 식으로 연결해 단편소설을 완성시켰다. ‘감정의 온도’의 윤여경 작가는 “챗GPT는 상황을 던져주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세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대화를 더 넣거나 상황을 더 자세히 그려내라고 명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냉정하게 보면 챗GPT가 쓴 소설의 수준은 아직 높지 않았다. 그래도 반전과 복선 장치를 사용하는 등 작가로서의 가능성은 이미 엿볼 수 있었다. 스토리텔링은 더 이상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공지능 시각화 기술의 발전이 특히 두드러진다. Gen-2의 예를 들어보자. Gen-2에는 텍스트를 영상으로 전환하는 모드1 말고도 7가지 모드가 더 있다. 그중 모드2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모드4는 영상과 이미지를 함께 입력받아 새로운 스타일의 영상을 생성한다. 모드2와 모드4는 텍스트만 입력받는 모드1보다 창작자의 의도가 더 정확하게 반영된 영상을 생성한다.

이런 기술들은 앞으로 영상 제작자들에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줄 것이다. 집에서 간단하게 찍은 영상도 Gen-2를 활용하면 SF 블록버스터 영화나 상업 3D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영상으로 바꿀 수 있다. 원래 이런 ‘고급’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선 CG 작업에 막대한 시간과 돈을 쏟아야 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영상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제작자’ 인공지능은 이미 영화 작업의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창작자 한 명이 자리에 앉은 채로 이야기를 써내고 영화까지 만들어내는 시대를 상상해보자. 아직은 억지스러운 상상일 수 있으나, 인공지능이 발전하는 속도와 방향을 고려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영화 제작자’ 인공지능이 과연 가능할까를 묻는 질문은 잘못됐다. 과연 언제부터 가능할 것이냐를 물어야 한다.

전통 영화가 대체될 가능성

인공지능을 접목한 영화 제작은 이미 시도되고 있다. 인공지능은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기대를 모은다. 4월10일 미국의 영상 제작사 ‘네이티브포린’(Native Foreign)은 ‘오픈에이아이’(OpenAI)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인 ‘달리’(Dall-E)를 활용해서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 ‘크리터즈’(CRITTERZ)를 공개했다. 숲속에 사는 작은 괴물 ‘크리터즈’들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인공지능 달리는 ‘크리터즈’ 캐릭터와 숲속 배경 등 시각화에 필요한 이미지 전부를 매일 수백 개씩 생성해냈다. 감독은 원하는 이미지를 선택하고 그것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시각화를 완성시켰다. 차드 넬슨(Chad Nelson) 감독은 “보통이었으면 6개월은 족히 소요됐을 이미지 제작을 일주일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작업 비용도 많이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Critterz'. 출처 Foreign Native

애니메이션이 아닌 극 영화는 어떨까.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현장에서 배우와 카메라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인공지능이 생성한 영상이 실제와 매우 흡사한 모습으로 발전될 가능성은 있다. 만들어진 영상은 가짜 티가 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아래 영상을 권한다. 지난 4월 20일 1인칭 슈팅 게임 ‘언레코드’(Unrecord)의 소개 영상이 공개됐다. 언레코드는 이미 영화와 드라마의 시각효과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언리얼엔진5’(Unreal Engine 5)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됐다. 게임 속 공간은 현실 세계의 어느 공간을 실제로 촬영했다고 생각될 만큼 사실적이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영상도 발전을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언레코드 수준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인공지능 영화가 극영화의 사실성을 따라잡게 된다면, 인공지능이 현장의 배우와 카메라를 사실상 대체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게임 'Unrecord' 소개 영상. 출처 유튜브 IGN 채널

인공지능 영화는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여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는 것은 영화 제작자들의 가장 무서운 악몽이다. 만약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영화 제작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반 이상 절약된다면, 제작자가 굳이 전통적인 제작 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미래엔 높은 효율성과 낮은 비용을 무기로 한 인공지능 영화의 제작이 보편화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영화감독이 인공지능의 힘을 빌리지는 않을 것이다. 컬러 영화가 대중화된 지금도 자신만의 영화적 표현을 위해 흑백 영화를 고집하는 감독이 있듯이, 영화는 인간 창의성의 고유영역이라는 신념을 포기할 수 없는 감독도 남아있을 것이다. 인공지능 영화의 제작이 보편화된 시대가 오더라도, 전통적인 형태의 극영화 제작 방식은 최소한 영화적 표현을 위한 선택지 중 하나로 남지 않을까 상상을 해본다.

모두가 영화를 제작하는 시대

영화 제작은 지금껏 일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부터 우리와 일상 속 희로애락을 같이해온 대중 영화까지, 모두 이른바 ‘전문 영화인’들의 손에서 태어났다. 영화 제작의 높은 비용과 기술의 장벽은 비전문가들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소수의 영화인이 점유한 영화산업은 다양성 측면에서 아쉬움을 갖게 한다. 한국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은 2017년부터 5년간 극장과 OTT에서 개봉한 한국 영화의 주인공 다양성을 분석했다. 주인공의 성별은 남성이 61.6%, 여성이 38.4%로 집계됐다. 40대 주인공 비율은 25.0%를 웃돈 반면, 60대 이상 주인공은 11.2%에 불과했다. 실제 한국의 인구는 남성과 여성 비율이 비슷하고 60대 이상 비율이 40대보다 훨씬 높다.

미국의 상황도 엇비슷하다. 할리우드는 다양성 수용을 지향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인종 편향성을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발간된 ‘할리우드 다양성 리포트 2023’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극장에서 상영된 미국 영화의 주인공은 백인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주인공의 78.4%가 백인인 반면, 흑인과 히스패닉 등 유색인은 도합 21.6%에 불과했다. 미국 내 유색인 비중이 43.1%에 이르는데, 영화에선 실제의 절반만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주도해온 영화 산업은 이처럼 실제와 전혀 다른 세상을 재현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영화 제작의 ‘민주화’ 시대를 열 것이다. 인공지능이 시나리오를 생성하고 프로덕션과 포스트프로덕션의 상당 부분을 자동화하는 시대가 오면, 영화 제작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라는 족쇄에서 해방될 것이다. 영화 제작의 ‘민주화’는 성별, 나이, 인종 등의 경계를 지우고, 모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화 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할 것이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영화 제작!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더 다양한 목소리가 스크린에 올라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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