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만화 '후르츠 바스켓'

*만화의 내용이 일부 들어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작중 등장인물의 이름은 한국어판에서 번역한 이름으로 썼습니다.

2000년대 초,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이었던 한국의 90년대생들에게 만화 ‘후르츠 바스켓’의 기억은 특별하다. 한 번이라도 이 만화를 봤던 사람들은 대부분 만화를 읽으며 흘렸던 눈물을 떠올릴 것이다.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라는 주인공의 대사로 유명했던 이 만화는 2000년대 초반 처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고, 2019년 다시 만들어져 3개 시즌에 걸쳐 방송됐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순정 만화’로 기네스북에 오르기까지 한 ‘후르츠 바스켓’,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았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일까?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것의 의미

후르츠 바스켓의 특별한 설정은 ‘이성에게 안기면 동물로 변하는 특정 가문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만화의 여주인공인 정수정은 함께 살았던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고서 혼자 살아가는데, 산책 중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집에서 같은 반 반장인 송유진과 서로 가까운 친척이지만 유진을 싫어하는 반 친구 송대협, 이들의 보호자 역할이자 소설가인 송시오를 만나게 된다. 이 세 사람은 송씨 가문 중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기묘한 저주에 걸려 있었다. 바로 이성에게 안기면 자신이 태어난 해의 상징 동물로 변하는 이른바 ‘십이지(十二支)의 저주’다. 수정이가 이들을 만난 첫날, 어쩌다 실수로 껴안게 되면서 동물로 변신해버린 모습을 보게 된다.

동물로 변해버린 송씨 가문 사람들, 왼쪽부터 주인공 정수정, 송대협(고양이), 송유진(쥐), 송시오(개).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2019년 버전 갈무리
동물로 변해버린 송씨 가문 사람들, 왼쪽부터 주인공 정수정, 송대협(고양이), 송유진(쥐), 송시오(개).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2019년 버전 갈무리

안는다는 행위는 때로는 어떤 말보다도 큰 위안을 준다. 서로를 꼭 껴안아 주는 순간, 우리의 심장은 가장 가깝게 맞닿는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고,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감정을 그대로 전해주기도 한다. 십이지의 저주에 걸린 송씨 가문의 사람들은 이성과 껴안는 순간 동물이 된다. 그래서 이들은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안겨 따뜻한 위로를 받기 어려웠다. 내가 껴안은 누군가가 눈앞에서 뱀이나 쥐로 변한다고 상상해보자. 무척 놀라서 두려움에 떨며 즉시 그 자리에서 도망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후르츠 바스켓에 나오는 송씨 가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슬픈 현실이자, 후르츠 바스켓의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이다.

십이지의 저주를 받은 송씨 가문의 사람들은 따뜻한 위로를 받지 못한 인물들이고, 그래서 저마다 결핍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여기에 주인공 정수정이 나타난다. 눈앞에 동물로 변해버린 이들을 보고 놀라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냐고 울먹이며 묻는 수정이. 동물로 변하게 된다는 이유로 타인과 거리를 두던 송씨 가문 사람들에게 수정이가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고 이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채워주는 내용이 후르츠 바스켓의 전반적인 스토리 구성이다.

존재가 잊힌다는 것

송씨 가문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가문 이외의 사람이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기억 은폐술’이라는 최면으로 기억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인데, 만화는 한 존재가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픔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송씨 가문의 또 다른 일원인 송가을은 주인공 수정이가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빌딩에 종종 놀러 와서 수정이의 일을 도와준다. 독일계 어머니를 닮아 노란색 머리를 가진 가을이는 수정이한테 자기 어머니가 무척 아름답다며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리광쟁이 동생이 있는데, 항상 엄마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고 이야기한다. 신나게 자랑하던 가을이 앞에 사진 속 모습 그대로의 어머니가 나타나 말을 건다. 수정이가 인사를 드리려는 순간, 어머니는 가을이한테 집에 계시는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니 너무 늦게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생과 함께 자리를 떠난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는 수정에게 가을은 담담하게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송씨 가문의 일원 송가을, 노란색 머리와 수려한 외모로 가끔 여성으로 오해받지만 남성이다.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2019년 버전 갈무리
송씨 가문의 일원 송가을, 노란색 머리와 수려한 외모로 가끔 여성으로 오해받지만 남성이다.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2019년 버전 갈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안았는데 기묘한 동물 새끼로 변했어. 그건 엄마한테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가을은 십이지 원혼의 저주에 걸린 아이의 부모는 필요 이상으로 아이를 보호하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자신의 엄마는 자신을 온몸으로 거부했다고 말한다. 자식을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한 어머니. 가을이의 아버지는 가을이를 껴안고 어머니의 기억을 지우는 것만이 어머니가 살 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기억을 지우던 날, 방문 밖에서 몰래 지켜보는 가을. 기억을 지워도 후회하지 않겠냐는 의사의 질문에 가을의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는 그 생물체 즉, 가을이를 낳은 것이라 말한다. 기억을 지운 엄마는 점점 건강해졌고, 두 달 후엔 웃을 수 있게 되었다며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가을을 보며 수정이는 눈물을 흘린다. 수정이가 일하는 빌딩으로 가을이가 계속 찾아오는 이유는 그곳에 자주 들르는 엄마와 동생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생각해, 모든 추억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싶다고, 설령 슬픈 추억이라도, 날 상처만 주는 추억이라도, 차라리 잊고 싶다고 바라는 추억이라도, 모두 짊어지고 도망치지 않고 노력하면, 노력하고 있으면 언젠가 그 추억에 지지 않는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어.”

가을이는 어머니가 자신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안고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수정이도 1년 전 어머니를 잃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뛰어가니, 싸늘해진 어머니가 있었다. 유일한 가족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떠올리며 수정은 가을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한다. ‘잊어도 되는 추억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믿고 싶다’는 가을이를 수정은 있는 힘껏 안아준다. 안는 순간 토끼로 변해버린 가을이를 꼭 안으며 자신도 그렇게 믿는다고 토닥인다.

토끼로 변한 가을이를 안아주는 수정이.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2019년 버전 갈무리
토끼로 변한 가을이를 안아주는 수정이.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2019년 버전 갈무리

다름을 포용하는 상냥함의 힘

후르츠 바스켓을 보며 사람들이 감동하는 부분은 주인공인 수정의 행동과 말이다. 수정이는 차별과 배척으로 생긴 타인의 결핍과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함부로 동정하지 않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공감해준다. 그리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친절한 말을 전달할 뿐이다.

수정이의 상냥한 성품은 작품 초반 송유진과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기에게 쥐의 원혼이 들어있는 것이 드러날까 두려운 송유진은 자신은 적당한 수준의 상냥함을 보여주는 선에서 타인과의 관계에 선을 긋는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리기 어렵고, 자신의 그런 모습이 싫다고 말한다. 자신의 친절함은 위선일 뿐이라고 말하는 유진에게 수정이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의 상냥함이 진실임을 믿는다고 말한다.

“욕망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쭉 갖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만, 상냥함은 개인 개인이 손수 만든 작품과 같은 거라서 오해하거나 위선이라고 생각하기 쉽단다. 믿는 것과 달리 의심은 누구나 간단히 할 수 있어, 수정이는 믿어주렴.”

작품에서 가장 상냥한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주인공인 수정이다. 크리스털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같은 수정이의 상냥함은 얼마나 오랜 시간 만든 작품이기에 이토록 빛이 나는 것일까. 송씨 가문 사람들이 겪는 아픔은 만화 속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기엔 실제 세계와 너무도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아픔에 공감하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지 않는 수정이의 모습과 행동은 시청자와 독자에게 전하는 치유의 메시지이기도 하며, 이런 상냥함이 결국 갈등을 해결한다는 서사를 만든다.

고양이 원혼이 들어있는 송대협은 특별한 처지에 있는 인물이다. 송씨 가문 내에서도 고양이 원혼은 더욱 극심한 차별을 받아왔다. 아이들은 고양이 원혼의 아이와 함께 다니면 저주가 옮는다며 그를 피한다. 고양이 원혼을 가진 사람은 가문의 공식 행사에도 참여할 수 없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아예 감옥에 유폐된다. 차별받는 가문 안에서도 차별받는 고양이 원혼. 단순히 고양이 원혼이 미워서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 원혼은 다른 십이지의 저주와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 원혼의 저주는 다른 저주보다 강해서 손목에 찬 염주가 빠지면 흉측한 괴물의 형상으로 변한다. 대협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매일 그의 팔에 있는 염주를 확인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의 팔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모습에서 어린 대협은 어머니가 가진 불안함과 두려움을 읽는다. 대협이 아직 어린아이였던 어느 날 대협의 어머니는 자살한다. 가문 사람들은 고양이 원혼의 아이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수군거린다. 대협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소리친다.

염주가 풀려 흉측한 괴물의 모습이 되어버린 대협을 수정이가 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괴물이 된 대협은 온 힘을 다해 수정으로부터 도망친다. 수정은 처음 보는 대협의 모습에 놀라지만 도망가는 그를 쫓아간다. 쫓아간 대협을 붙잡고 놓지 않는 수정에게 대협은 날 선 말을 쏟아낸다. 누가 봐도 무서운 모습, 냄새도 이상한 괴물. 그런 그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자살해버린 어머니를 떠올리며,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고 소리친다. 있는 그대로의 대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머니. 괴물과 같은 모습의 아들이지만 무섭지 않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 모든 말이 거짓임을 증명했다. 대협은 수정 또한 어머니처럼 거짓을 이야기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를 붙잡은 수정의 첫 마디는 대협의 모습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의 팔을 붙잡고 흐느껴 울면서 그래도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무서워요, 지금의 대협이는 목소리도 다르고 본 적도 없는 모습이고 무서워요. 그래도, 앞으로는 제대로 알고 싶어요, 무섭고 슬픈 일도 다 말해줘요, 고민할게요, 같이 밥 먹고,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같이 살아가고 싶어요.”

무섭지만 그래도 같이 살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수정이.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2019년 버전 갈무리
무섭지만 그래도 같이 살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수정이.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2019년 버전 갈무리

대협이 어머니에게 바라던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잠깐 몹시 나쁜 병에 걸린 것이라며, 그래도 사랑한다고 의무감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해주길 바랐다. 그런 그의 결핍을 수정이 채워준다. 솔직하게 마주하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소통이 필요한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상냥한 공감

자신이 받는 차별과 억압이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대협은 가문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는 쥐의 원혼, 송유진을 원망하고 탓한다. 유진의 입장에서는 본인은 가문에서 자유롭게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든 가문에 들어오려는 대협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유진과 대협은 상대방이 마주한 서로 다른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대립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수정을 만나면서 이들은 변화한다. 작품 후반부에 유진과 대협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증오를 없애는 방법은 어쩌면 누군가의 상냥함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듬어주는 것, 제대로 된 소통은 타인의 입장에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후르츠 바스켓>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비판할 지점이 있을 수 있다. 송씨 가문의 가주(家主)이자 신의 원혼이 깃든 송인영의 과도하게 폭력적인 모습에 대한 비판, 주인공 수정이의 모습이 여성상을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것으로 왜곡한다는 비판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후르츠 바스켓에 담겨있는 공감과 소통의 장면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지 한 번쯤 생각해볼 법하다.

친절과 상냥함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사회다. 착하거나 친절하면 손해만 볼 뿐이라 말한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틀렸다고 말하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모르겠다며 화를 내기도 한다. 나와 다른 사람을 보고 혐오를 느낀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혐오를 말하는 것도 자유의 한 부분이라 말한다. 우리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함께 모여 사는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으로 가는 길에 공감이 있다. 공감은 타인을 위한 상냥함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만화는 담고 있다.

후르츠 바스켓에서 상냥함은 개인 개인이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이는 공감을 위한 상냥함이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쉽지 않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면 당신의 상냥함에 누군가 힘을 얻을 것이고,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다시 후르츠 바스켓의 수정이를 보고 초등학생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상냥함은 그때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커졌는지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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