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아테네의 장군이자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존 강대국이 신흥 강대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다 큰 전쟁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스파르타를 맹주로 한 펠로폰네소스동맹과 아테네를 축으로 한 델로스동맹이 20년 전쟁을 벌인 것도 기존 강자인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도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투키디데스 함정’이 재현된다면미국 클린턴 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피할 수 없는 전쟁(Destined for War)>이라는 책에서 이런 현상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
“여름철에는 하굣길에 강가에 매어놓은 소를 몰고 가야 했지요.” (황두리촌놈)“자라바위라고도 합니다. 장마철에 무척 큰 자라가 올라와 있어 모두 잡으려고 했는데...” (솔무정박)“우리는 오리바위라고 했어요. 하굣길에 저기서 수영하다가 죽을 뻔했어요.” (꽃바위)잔잔한 물가에 나룻배가 쉬고 있는 정경을 담은 흑백사진. ‘강 한가운데 보이는 것은 황소바위’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 아래 저마다의 기억을 담은 댓글들이 이어진다. 사진에 찍힌 곳은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있던 황석나루. 남한강 북쪽 황석리에 살던 학생들은 강 건너 학교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를 직접민주주의의 승리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대의민주주의의 한 요소이고, 또 대의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직접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면 촛불집회는 인정될 수 없었으리라는 걸 생각하지 못하죠.”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개념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직접민주주의란 시민이 번갈아 공직을 맡는 것을 말한다. 박 학교장은 “고대 아테네에서는 대부분 공직을 시민이 돌아가면서 직접 맡았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막 창시했을 때 그를 따르는 사람은 소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계시를 들었다는 그의 말은 메카에서 무시당한다. 무함마드를 감싸 주고 보호해주던 아내 카디자가 죽고 위기가 찾아온다. 메카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계획을 알아차린 무함마드는 메카를 탈출해 메디나에 정착한다. 이 사건을 이슬람교도들은 ‘헤지라(성스러운 이동)’이라고 부르고,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난 날을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메디나에서 힘을 기른 무함마드는 군대를 이끌고 메카를 점령한다. 이를 ‘지하드(성스러운 전쟁)’라 부
촛불대선을 앞뒀지만 농업정책은 외면받고 있다. 내년까지 5년마다 정하는 ‘쌀 목표가격’을 적용해야 하는 등 현안이 쌓여 있지만 다른 이슈에 밀려 있다. <단비뉴스> 지역농촌부는 제천에서 농사 짓고 있는 농민들과 관계자들을 찾아가 농촌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자식에게 물려주기 미안한 가업김태완(63)씨는 충북 제천시에서 40년째 딸기 농사를 짓고 있다. 평일에는 부인과 함께 농사를 짓고, 휴일이면 도시에서 일하는 자식들이 찾아와 일을 거든다. 김씨는 “내가 아쉬워서 (휴일마다) 부르고 있다”며 자식들을 대견스러워했다. 새벽부터 저녁
시종의 작은 실수에도 참지 못하고 목을 날리는 페르시아 대왕 크세르크세스. 그의 명대사 "나는 관대하다." 영화 <300>은 페르시아를 악으로 규정하고 왜곡시킨 판타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폭력과 관용을 오가는 그의 태도에는 역사적 사실이 녹아있다. 꼽추 에피알테스는 외모와 장애 때문에 스파르타에서 버림받지만 페르시아에서 환대받는다. 이는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 다리우스 대왕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페르시아에게 멸망한 바빌론은 반란을 일으킨다. 페르시아의 귀족 조피로스는 귀와 코를 자르고 몸에 상처를 내어 바빌론에 거짓으로 항복한다. 고
1941년 출간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독재자에 열광하는 심리를 들여다 본다. 그는 권위주의가 득세하는 과정을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관계로 푼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기에 불안과 고독이 따라 온다. 마조키스트는 모든 권리를 권력자에게 맡긴다. 그들은 자유 대신 독재자의 선택과 보호 아래 편안함을 느낀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권리에서 도망친 사회. 이런 사회는 극단적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흘러갔다. 프롬의 이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할까?EU의 이민자 정책에 반발한 브렉시트 찬성과 러스트
마흔넷 무직. <열하일기>를 남긴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사신 일행에 오를 당시 그런 상태였다. 청나라 사절단에 뽑힌 것도 총책임자인 8촌 형 박명원의 힘, ‘빽’이 컸다. 요즘이야 실학이 조선 중기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듯이 자세히 다룬다. 하지만 당대에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주류에서 밀린 재야학자 신세였다. 하지만 연암의 글에서 그런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는 전혀 없다. 유쾌한 풍자를 잊지 않으면서, 사회 비판에도 날을 세운다. 천하다고 여기는 직업을 가지고도 자신만의 철학으로 건실하게 살아가는 삶을 치켜세운다. 자신이 처한 상황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후 8시. 아일랜드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신이 바로 이 시간에 지구를 만들었다고 1658년 밝혔다. 어셔는 천지창조의 날짜를 알기 위해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행적을 뒤쫓는다. 가령 130세에 자식을 나은 아담, 600세에 대홍수를 맞은 노아, 75세에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 등이다. 사람들은 수세기에 거쳐 어셔의 주장을 믿는다.과학의 발전은 어셔의 학설을 뒤집는다. 과학은 지구가 약 47억 년 전에 형성됐다고 알려준다. 지구형성에 대한 과학이론이 정립된 것은 1896년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뉴욕타임즈>는 작가 폴 오스터에게 크리스마스에 실을 단편소설을 써달라고 의뢰한다. 감상적인 이야기는 빼달라는 요구를 덧붙여서. 오스터는 툴툴거린다. “대체 크리스마스에서 '감상'을 빼면 뭐가 남는단 말인가.” 오스터의 불평처럼,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은 인간애가 묻어나는 따뜻한 이야기를 바란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말이다. 구두쇠 부자 영감의 전형 스크루지. 그는 고독하게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개과천선한 스크루지의 선행처럼 크리스마스는 구세군의 종소리, 익명의 기부자, 연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리영희는 자서전 <역정>에서 자신의 청년 시절을 되돌아본다. 한국전쟁 피난길에 그의 가족은 먼 친척에게 잠시 지낼 거처를 부탁한다. 친척은 매몰차게 가족을 내쫓는다. 병든 동생은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당시 리영희는 통역장교로 전선에 나가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휴가를 나와 어떻게 그렇게 야박하냐며 따져 보지만 다 지난 일이다. 전방에서 추위와 공포, 그보다 더 무서운 굶주림에 시달린다. 며칠을 쫄쫄 굶을 때 병사 한 명이 아껴둔 비상식량을 내민다. 그는 그때 먹은 맛과 병사의 따뜻한 마음이 잊히질 않는다고 기억을 더듬는다.
<금각사>의 미조구치는 수백 년 이어온 문화재 ‘금각사’에 불을 지른다. 미조구치의 삶은 열등감으로 뒤틀렸다. 그는 말더듬이다. 그가 하려는 말은 한참을 입안에서만 맴돌다 때늦게야 뱉어진다. 아이들은 비웃는다. 그는 그런 자신을 추악하다고 여기고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금각사다. 아름다움은 상상 속에만 있고 현실은 자신의 모습처럼 초라하다. 그는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현실의 금각사에 성냥불을 그었다.미조구치가 아름다움을 위해 불을 붙였다면, 광장의 학생들은 '정의'를 위
촛불집회에 갔다. 발길 내키는 대로 걸었다. 광화문 앞에서 농민 시위대를 만났다. 농민들이 상복을 입고 청와대가 쓰인 대형상여를 멘 장면에 시선이 멈췄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를 '하-야~ 하-야~'로 풍자한 구호에 시민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엄중한 퇴진요구에 웃음의 미학이 피어나고, 역설적 시위문화에 민주주의가 날개를 단다. 시민들이 많이 몰리지 않은 곳에서는 소규모 공연이 발길을 붙잡았다. 타악기에 노래, 1인 퍼포먼스.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그렇게 3시간여를 걷다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촛불을 든 시민 사이로
카메라가 혼자 길을 걷는 아이를 따라간다. 아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묻는다. "아저씨, 여기서 어떻게 가요?" 그렇다. 카메라는 아저씨이고 아이는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스태프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그들이 없는 척 연기하는 어른 연기자와 다르다. 그 아이는 방송을 의식하기엔 아직 어리다. 그런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은 욕구가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처럼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프로그램 열풍을 낳았다.어린아이는 순수한 만큼 잔혹한 일면도 지닌다. 개미떼를 꾹꾹 눌러 죽이거나 개구리를 잡아서 집어 던진 어
후한(後漢) 말, 북경을 포함한 중국 북동부 유주(幽州) 땅에 북방 유목민들이 수시로 내려와 약탈을 일삼는다. 후한 조정으로부터 유주 통치를 위임받은 호족 공손찬은 북방 유목민족 정벌을 빌미로 백성들을 괴롭힌다. 《예기(禮記)》의 <단궁하편(檀弓下篇)>에 나오는 “가정맹어호야(苛政猛於虎也)”가 따로 없다. 유목민족의 약탈보다 가혹한 폭정을 더 견디기 힘들다. 공손찬의 수탈과 전쟁에 지친 백성들은 지난날 유주에서 덕치를 펴 존경받던 전 유주자사(幽州刺史) 유우(劉虞)를 그리워한다. 후한 조정에서 유우를 다시 파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말 이런저런 시상식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린다. 상을 받기까지 노력을 폄하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지나치게 겸손하고 또 뻔한 수상소감을 듣고 있으니 그렇다. 뭐 해프닝이라도 없나 하는 심술만 난다. 노벨상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틀린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다. 옳은 이야기를 자꾸 해도 사회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학내 카르텔로 인한 인재육성 미비, 정부주도 명령식 학문사업, 그 결과 기초학문이 부실하고 실용학문에만 몰두. 창의성 저해.’ 가을이 오면 똑같은 내용이 어김없이 지
국가는 ‘세속의 신(Mortal God)’이다. “국가가 모든 권력을 소유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자의 신념은 여기에 뿌리를 둔다. 개인에게 주어진 힘은 자신을 지키는 이기적인 목적에서만 사용되어 불안한 사회를 만든다고 본다. 홉스는 국가가 정당한 폭력만 행사한다면 모두가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홉스의 소망은 소박했지만, 힘을 가진 현실의 권력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권력자는 신이 아니라 불안과 욕망을 가진 ‘필멸자’이기 때문이다. ‘필멸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건축’을 활용했다. 역사적으로 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