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외교

▲ 곽호룡 기자

후한(後漢) 말, 북경을 포함한 중국 북동부 유주(幽州) 땅에 북방 유목민들이 수시로 내려와 약탈을 일삼는다. 후한 조정으로부터 유주 통치를 위임받은 호족 공손찬은 북방 유목민족 정벌을 빌미로 백성들을 괴롭힌다. 《예기(禮記)》의 <단궁하편(檀弓下篇)>에 나오는 “가정맹어호야(苛政猛於虎也)”가 따로 없다. 유목민족의 약탈보다 가혹한 폭정을 더 견디기 힘들다. 공손찬의 수탈과 전쟁에 지친 백성들은 지난날 유주에서 덕치를 펴 존경받던 전 유주자사(幽州刺史) 유우(劉虞)를 그리워한다. 후한 조정에서 유우를 다시 파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목민족인 오환족 왕 구력거는 친교를 선언하고 즉시 군사를 물려 북방 초원으로 돌아간다. 유우는 유목민과 전쟁 대신 교역에 나선다. 유우가 다스렸던 시기 유주는 도적도 없고 메뚜기떼조차 비껴갔다고 할 만큼 태평성대다. 하지만 유우와 호족 공손찬의 갈등은 불 보듯 뻔하다. 야심이 없던 유우는 여러 차례 공손찬을 제거할 기회를 놓친다. 결국 유우는 공손찬의 칼에 목이 날아간다. 기회는 숨을 죽이고 있던 원소가 낚아챈다. 원소가 유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우자 민심은 물론 유목민족까지 그의 편에 선다. 이 덕에 공손찬을 멸한 원소는 당대 최대 세력으로 떠오른다.

▲ 유주는 후한 13개 행정구역 가운데 북동부 지역이다. 전국시대 연나라 근거지이자 현재 북경과 천진을 포함한다. Ⓒ 구글 지도

시진핑의 외교행보를 보면 원소가 생각난다. 일본과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분쟁으로 외교갈등이 계속될 무렵, 시진핑은 <논어>의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양자회담을 연다. 중국이 덕이 있는 대국임을 내세우는 한편 일본과 갈등을 끝내 외교불이익을 막고자 함이다. 사드 문제 때는 “물을 마실 땐 그 근원을 생각한다”며, 중국이 김구와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운 사실을 되새긴다. 역사적 정당성이 중국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우리 정부에 압박을 가하는 전략이다. 문화혁명으로 자신의 역사를 잔혹하게 짓밟더니 필요에 따라 역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도 아는 능수능란함이 돋보인다. 중국의 외교는 역사에서 명분을 찾아 중국의 국민들에게 자존심을 세워준 뒤 철저히 실리를 좇는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협정 결과, 우리나라는 일본에 ‘돈’을 얻었다. 돈은 ‘한강의 기적’에 밑거름으로 요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제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직접적인 보상은 뒤로 밀렸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우리 후손에게만은 잘 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2014년 3월 22일 자 <동아일보>가 전한 파독 광부 위문 현장에서 박정희가 흘린 눈물 호소다. 눈물은 경제성장 논리와 한데 섞여 일제 피해자의 요구를 찍어 누르는 데 효과적인 방패였다. 2015년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12.28협정에서 또다시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는 결정을 내렸다. 과거와 달리 국민을 달래줄 경제성장의 핑계조차 찾을 수 없는데 말이다. 오히려 일본에 ‘감성적 조치’를 요구했다가 “털끝만큼도 그럴 마음 없다”라는 외교 굴욕을 맛본다. 이웃나라에 받는 굴욕은 물론 피해자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도 치료하지 못한다.

백성의 마음을 우선해서 다스리며 적대 민족까지 감화시켰던 한나라 유우의 정치(情治). 이웃나라에 ‘감성적 조치’를 행하라며 화살을 돌리기 전에 국민의 감정(感情)부터 보듬는 게 순서요 도리다. 그렇게 국민의 목소리를 한데 모은다면 이웃나라를 감동시키고 또 압력을 가할 힘이 생긴다. 역사가 전해주는 교훈이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강민혜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