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학문

▲ 곽호룡 기자

연말 이런저런 시상식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린다. 상을 받기까지 노력을 폄하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지나치게 겸손하고 또 뻔한 수상소감을 듣고 있으니 그렇다. 뭐 해프닝이라도 없나 하는 심술만 난다. 노벨상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틀린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다. 옳은 이야기를 자꾸 해도 사회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학내 카르텔로 인한 인재육성 미비, 정부주도 명령식 학문사업, 그 결과 기초학문이 부실하고 실용학문에만 몰두. 창의성 저해.’ 가을이 오면 똑같은 내용이 어김없이 지면을 물들인다.

그런데 정말 바꿀 의지는 있는가? <채식주의자>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 기자들은 어김없이 한국의 노벨상 가능성에 관해 묻는다. 스미스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답을 준다. “한국의 노벨상 집착은 당황스럽다. 상은 상일 뿐이다.” 하지만, 왜 모를까. 한국에서 상은 단지 상이 아니니까 집착하는 사실을. 세계제일의 ‘노벨상’은 거대한 문화자본을 만든다. 출판사들은 노벨상발표에 앞다퉈 관련 책들을 찍어낸다.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말할 것 없다. 모두가 노벨상이 주는 이미지에 홀려 지겹도록 노벨상 이야기를 떠든다. 학문을 학문답게 하는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헤겔은 개인이 자아를 찾는 과정을 변증법으로 풀어낸다. ‘나’는 내가 있는 세계의 공동체 안에서 안정을 느낀다(정). 하지만 지배권력은 가끔 멋대로 행동하려는 나를 억누른다(반). 나는 세계와 대결을 통해 거리를 확인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합). 진정한 자아라니.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낯간지럽지 않나.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를 찾는 가능성마저 부정한다면, 학문은 남들이 인정한 도서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며 부를 쌓는 과정일 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뽑힌다. 하지만 그는 수상저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불완전한 책이라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는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 사르트르가 노벨상과 대결한 사실은 끊임없이 회자된다. 내면의 ‘진정성’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가 열려있다는 의미다.

▲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을 받지만 스웨덴 한림원의 연락에 무대응으로 일관한다. Ⓒ flickr

밥 딜런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는 소식이 나오자 그의 콘서트에서 관객들이 노벨상을 외쳐댔다. 밥 딜런은 대답 없이 프랑크 시나트라의 <왜 나를 지금 바꾸려 하지>를 앙코르곡으로 부른다. 가사는 들려준다. “내버려두라”고. 밥 딜런의 노벨상 선정을 놓고 불거진 문학의 경계 논란에 대한 그의 답이다. 옛 생각이 난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혼나는 나를 두둔하며 그런 말씀을 하셨다. “쫌 내비두라. 아가 그라면서 크는 거지”라고. 자아실현이나 창의는 간섭이 아니라 자율에서 시작된다는 교육철학을 이론이 아닌 몸으로 익히신 할머니식 표현이다. 노벨상 열풍이 좀 사그라져야 하지 않을까? 문화자본이 추구하는 욕망에 편승하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면.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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