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상징

▲ 곽호룡 기자

1941년 출간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독재자에 열광하는 심리를 들여다 본다. 그는 권위주의가 득세하는 과정을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관계로 푼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기에 불안과 고독이 따라 온다. 마조키스트는 모든 권리를 권력자에게 맡긴다. 그들은 자유 대신 독재자의 선택과 보호 아래 편안함을 느낀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권리에서 도망친 사회. 이런 사회는 극단적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흘러갔다. 프롬의 이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EU의 이민자 정책에 반발한 브렉시트 찬성과 러스트벨트의 '샤이 트럼프'는 프롬의 자유로부터 '도피한 사람'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들은 목소리를 냈고 사회를 바꿨다. 그럼에도 마조키스트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쇠락한 과거의 영광, 궁핍한 삶, 떨어진 자존감, 타인에 대한 증오, 과잉된 애국심이 그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맡길 구체적인 독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혐오와 그 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상대에 대한 혐오만 남는다. 그것이 집단을 이루고 익명성 안으로 숨을 때 정치사회적으로 큰 힘을 갖는다.

▲ 파시즘에 순종한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한 에리히 프롬의 이론은 21세기에도 유효해 보인다. ⓒ Flicker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의 가격표를 보면 놀란다. 똑같은 가방일 뿐인데 브랜드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소비자는 상품의 유용성이 아니라 브랜드가 주는 상징을 가지려고 기꺼이 돈을 쏟는다. “종교나 지역 그리고 직업이 안정된 정체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시대에, 이 공백을 기업의 브랜딩이 채워주고 있는 것.” 미디어 평론가 토드 기틀린의 말이 정치에도 녹아든 듯하다. 보수와 진보라는 입장을 가치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업신여기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패션으로만 보인다.

정치인들은 이러한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올라탄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검에 성실히 조사받는 대신 불우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내세워 자신의 지지자들을 자극하는데 급급하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차기대선 지지율 1위에 걸맞지 않게 '심판론'을 내세우며 개헌이나 사드배치라는 정치현안에 대해 모호한 입장으로 숨는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권력을 분산하는 개헌에 반대하고서 지지율이 오르자 대연정을 제안하는 기회주의적 전략에 기댄다. 정치적 신념에 따른 정책대결 대신 정치적 이미지를 조장하는 정치공학에 목멘다. 국민통합을 말하지만 집단 갈등만 가속화할 뿐이다.

프롬은 사디스트와 마조키스트의 관계를 “변질된 형태의 사랑”이라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의 한 형태다. 자기 자신의 매력에 도취돼 연못가에서 말라 죽은 그리스 신화 속 나르시소스를 떠올려 보자. 우리 정치인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이기심을 이용하는 이미지 정치로는 산적한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경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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