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추천 좋은 기사] 2022년 한국기자상 지역 기획보도부문 수상 - 세탁비 대신 이야기를 받는 산복빨래방입니다

산복도로란 ‘산 중턱을 지나는 도로’라는 뜻이다. 주도로의 교통난을 해소하거나 산마을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어느 지역에나 산복도로가 있지만, 부산 산복도로의 형태는 독특하다. 부산진구, 동구 등 다섯 개의 구를 지나는 22킬로미터(km)의 도로가 부산의 골격을 이루는 금정 산맥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산복도로를 따라가면, 부산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평지에는 일본인들이 살았다. 일자리를 찾아온 외지인들은 산에 올라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한국전쟁 시절 부산에 내려온 피란민들은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 정착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절엔 여러 공장이 산을 따라 지어졌다. 그곳에서 일하려는 외지 출신 노동자들이 산복도로의 윗마을에 몰려들었다.

부산진구 산복도로의 위쪽에 형성된 호천마을에는 그런 이들의 후손이 살고 있다. 마을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 등을 통해 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고, 복지관이 세워졌지만, 가끔 관광객이 찾아올 뿐이었다. 주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 호천마을 전경. 산복빨래방 유튜브 갈무리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 호천마을 전경. 산복빨래방 유튜브 갈무리

<부산일보> 디지털미디어부 ‘2030팀’의 두 기자와 두 PD는 단편적으로 기록되어온 호천마을의 진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적어도 몇 달을 함께 지내야 주민들의 진정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과 친밀해지려면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먼저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료 빨래방을 차렸다. 호천마을에는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빨래방이 없었다. 집에서 처리하기 힘든 이불 빨래를 무료로 할 수 있는 곳이 생긴다면, 주민들도 반길 것이라고 취재팀은 생각했다. 일정 기간 운영되는 가게를 열고, 그 공간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이슈를 취재하는 ‘팝업 스토어(pop-up store) 저널리즘’을 구현하겠다는 프로젝트였다.

지난해 5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취재팀은 ‘산복 빨래방’을 열어 주민들의 빨래를 도왔다. 세탁비를 받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로는 마을 에어로빅에 참여해 함께 춤췄다. 비가 오면 전을 함께 부쳐 먹었다. 날이 좋으면 함께 소풍을 갔다. 주민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영화관에도 갔다. 마을 주민의 삶에 스며들자, 어머니이자 노동자였던 이들의 진솔한 삶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해 5월 2일 부산일보 1면에 실린 ‘세탁비 대신 이야기를 받는 산복빨래방입니다’ 소개 기사. 출처 부산일보
지난해 5월 2일 부산일보 1면에 실린 ‘세탁비 대신 이야기를 받는 산복빨래방입니다’ 소개 기사. 출처 부산일보

호천 마을과 산복 빨래방의 이야기는 지난해 5월부터 10월까지 <부산일보>에 24차례에 걸쳐 보도됐다. 또한 유튜브 채널 <산복빨래방>을 열고 39편의 영상을 올렸다.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채널의 구독자 수는 4000여 명에 이르렀다.

기사 쓰고 상 받고 책 내고 영화까지 만들다

취재팀은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으로 회사에서 2천만 원을 지원받았다. 지난해 1월부터 여러 번 산복 도로와 호천 마을을 답사했다. 주민들이 자주 다니는 계단 중간 길에 위치한 40년 된 폐가를 수리하기로 했다. 벽지와 바닥 등은 인테리어 업체를 불러 교체했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벽타일을 취재팀이 직접 시공했다. 대형 세탁기 두 대와 건조기 두 대를 들였다. 통유리창을 내고 주민들이 쉴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을 놓았다. 빨래를 해본 적 없는 취재팀은 취약계층에게 무료로 빨래해 주는 단체를 찾아가 빨래 연수를 받기도 했다. 그해 5월 9일, ‘산복 빨래방’이 문을 열었다.

일본의 규슈 서일본신문 히라바루 나오코 기자가 산복빨래방을 취재했다. 지난해 6월 30일 규슈 서일본신문 4면에 기사가 실렸다. 첫 문장에 ‘빨래방으로 출근하는 기자가 있다’라고 적혀있다. 출처 부산일보
일본의 규슈 서일본신문 히라바루 나오코 기자가 산복빨래방을 취재했다. 지난해 6월 30일 규슈 서일본신문 4면에 기사가 실렸다. 첫 문장에 ‘빨래방으로 출근하는 기자가 있다’라고 적혀있다. 출처 부산일보

취재팀은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빨래방을 운영했다. 빨래방 구석에 긴 책상을 놓고 영상 편집과 다른 취재를 병행했다. 언론사에서 가게를 열어 취재한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 이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져 <규슈 서일본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부산일보 디지털미디어부 2030팀은 산복 빨래방을 만든 과정과 후일담을 모아 지난 6월 책으로 출간했다. 출처 남해의 봄날
부산일보 디지털미디어부 2030팀은 산복 빨래방을 만든 과정과 후일담을 모아 지난 6월 책으로 출간했다. 출처 남해의 봄날

이 성취를 인정받아 54회 한국기자상 지역 기획보도부문에서 수상했다. 지난 6월, 취재 과정과 기사, 후일담을 모아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빨래방>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또 취재기를 담은 약 10분 분량의 단편 영화 <산복빨래방>을 제작했다.

호천마을 주민이 되어가다

기사에는 구어체와 문어체가 번갈아 등장한다. 산복 빨래방과 마을에서 일어난 일은 이야기를 들려주듯 존댓말의 구어체로 적었다.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는 문어체로 적어 그들의 삶을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1~2편 기사에는 산복 빨래방의 취지와 공사 현장을 담았다. 3편에서는 주민들과 에어로빅하며 친해지고 바다로 소풍을 떠난 이야기를 전했다.

이 밖에도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여섯 편에 걸쳐 보도했다. 주민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주거나 함께 영화관에 갔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없는 이들을 위해 빨래방에서 잠시 사진관을 열기도 했다. 또한 추석에는 주민들이 가족들에게 전하는 마음을 영상으로 만들었다. ‘마을투어’를 운영해 관광객의 시선에서 산복 도로를 담기도 했다.

주민들의 경이로운 삶

호천마을 주민들이 고둥을 캐러 떠난 소풍에 취재팀이 함께했다. 주민들은 각자 준비해온 나물 반찬을 알루미늄 대야에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산복빨래방 유튜브 갈무리
호천마을 주민들이 고둥을 캐러 떠난 소풍에 취재팀이 함께했다. 주민들은 각자 준비해온 나물 반찬을 알루미늄 대야에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산복빨래방 유튜브 갈무리

<기자협회보>에 나온 취재팀의 인터뷰를 보면 그 노고를 알 수 있다. 취재 초기에는 주민과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노트북과 녹음기를 켜지 않았다. 5월부터 빨래방을 운영했지만, 주민들의 사연은 7월 말 이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주민 한 명을 취재하는 데 두세 달이 걸릴 때도 있었다.

단골손님인 김순이 씨(왼쪽)가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을 산복 빨래방에 가져왔다. 사진 뒷면은 반창고로 덧대져 있었다. 이 사진을 산복빨래방 직원들이 복원해줬다. 산복빨래방 유튜브 갈무리
단골손님인 김순이 씨(왼쪽)가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을 산복 빨래방에 가져왔다. 사진 뒷면은 반창고로 덧대져 있었다. 이 사진을 산복빨래방 직원들이 복원해줬다. 산복빨래방 유튜브 갈무리

그리고 그들의 삶을 기사 8편부터 10편, 12편, 16편에 담았다. 이들은 젊은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산복 도로에 정착해 근처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이자 어머니였다. 신발공장, 염색공장, 고무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버티고 가족을 먹여 살렸다. 기사와 영상 말미에는 이들의 삶에 큰 경의를 표한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50여 년 동안 호천마을에서 거주한 현덕순 씨. 20세에 결혼한 그는 생계를 위해 남편과 함께 부산에 왔다. 23세부터 부산 삼화 고무공장에서 신발창을 붙이는 ‘창쟁이’로 일했다. 하루 30명이 나이키 신발 800족을 만들었다. 출처 부산일보
50여 년 동안 호천마을에서 거주한 현덕순 씨. 20세에 결혼한 그는 생계를 위해 남편과 함께 부산에 왔다. 23세부터 부산 삼화 고무공장에서 신발창을 붙이는 ‘창쟁이’로 일했다. 하루 30명이 나이키 신발 800족을 만들었다. 출처 부산일보

기사 15편과 17편에서는 마을 개선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담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가파르고 폭이 좁아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계단이 아니라 공원, 계단 손잡이 등 실생활에 필요한 작은 시설이었다.

지역 언론만이 할 수 있는 취재

지난해 10월 31일 이후 산복 빨래방의 운영을 호천마을 주민협의회가 맡기로 했다. 처음 빨래방을 차리면서 정한 약속이었다. 잠깐 반짝하는 여느 도시재생 사업과 달리, 산복 빨래방이 주민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돕는 편의시설이 되길 취재팀은 바랐다. 그 뜻을 도우려고, 유한양행은 세제 1000회분을 무료로 제공했다.

이 보도는 <미디어오늘>에서 주최한 ‘2022 저널리즘 컨퍼런스’에서 ‘솔루션 저널리즘’의 대표 사례로 뽑히기도 했다. <기자협회보>는 이 기사를 ‘지역 언론의 미래’라고 칭찬했다. 기자협회가 선정한 ‘386회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이상배 <부산일보> 기자는 말했다. “산복 빨래방을 통해 지역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서 듣고 전하겠다는 우리의 초심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반년 동안 우리는 기자가 아니라 산복 도로 주민이 됐습니다.”

*기사 원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좋은 기사들이 있다. 저널리즘의 이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기사다. 언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도 여전히 언론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하는 기사이기도 하다. 기자는 그런 기사를 꿈꾸고, 독자는 그런 기사를 기다린다. <단비뉴스>는 2000년대 이후 국내외 주요 기자상 수상작을 중심으로 기자와 독자에게 두루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기사를 골라 소개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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