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어에는 '시간, 때'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다. 크로노스(cronus)와 카이로스(kairos)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인간의 목적의식이 들어간 주관적, 정성적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기회와 행운의 신'이라고도 불리는데, '결정적 순간, 기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우리의 삶이 항상 기회가 가득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쉬지 않고 흘러가는 크로노스 시간 속에서 이따금 찾아오는 카이로스 시간이 더 소중한 이유
한번도 가본 적 없다고 생각했던 장소가 낯익을 때 느끼는 당황스러움은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터이다. 몇 년 전 그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겹칠 때, 기억 너머로 잊고 있었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기억의 소환은 때때로 장소에 의해서, 일기장의 글을 통해서, 비 오는 날 마신 커피를 통해서도 일어난다.이처럼 우리는 현재의 일상에서 우연한 자극으로 과거의 시간을 마주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적셔 먹은 마들렌으로 잊고 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되찾는 상황을 묘사한다. 잃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대개 거부반응을 보인다. 감히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의 귀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심 돈만 있으면 못할 게 없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돈은 권력을 가져다주고,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며 욕망을 이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돈은 천의 얼굴로 다가온다.그래서일까? 돈은 우리 욕망을 경고하는 뜻을 담고 있다. 영어 ‘머니(money)'는 ‘경고’라는 뜻의 라틴어 ‘Monete’에서 유래했다. ‘Monete’는 본래 부와 풍요를
38살의 중년, 철학자 몽테뉴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그의 목표는 '관계밀도의 제로화'였다. 다시 말해 이때까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온 그가 공직, 궁정, 아버지, 남편으로 요구되는 일을 중단하고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질문에만 몰두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고 그 공간을 '치타델레(zitadelle)'라 불렀다. 몽테뉴는 세상과 물리적으로 멀어진 그 공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아는가'란 질문과 함께 정신적으로는 세상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지금 대다수 한국인에게 치타델레는 언감생심이다
마을 단위로 웅성웅성 버스에 오른 주민들. 처음엔 대피 훈련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모였다가 ‘발전소가 터졌다’는 얘기를 듣고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어린아이를 끌어안는 젊은 엄마, 버스에 같이 타지 않은 아들 때문에 애를 태우는 노모. 버스 운전대를 잡은 처녀는 어떻게든 원전에서 멀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페달을 밟지만 곧 망연자실한다. 너나없이 몰려나온 차들 때문에 다른 도시로 나가는 길이 꽉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멀리서 몰려오는 방사능 구름.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달아나지만 얼마
비행기로도 11시간이 넘는 타지에서 날아온 독일 생태학자가 아무런 연고 없는 경북 영주 내성천과 사랑에 빠졌다. 카리나 슈마허(Karina Schumacher·33) 내성천살리기 활동가 이야기다. 그는 2012년초 한국에 정착해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기장) 생태공동체운동본부에서 독일복음선교연대(EMS) 생태선교동역자로 5년간 교육자료 제작, 생태교육 등의 일을 해왔다.학문 연구를 넘어 현장활동에 집중하고 싶었던 그는 2017년 초 영주로 내려가 '내성천 살리기 운동'에 뛰어들었다. 지난 7월 26일 서울 종로구 누하동 ‘회화나무 카페
img { cursor:hand;}“원전 없는 곳으로 빨리 도망가고 싶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지난 4월 20일 오후 8시 무렵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자력홍보관 앞의 대형 농성천막. 원전 인근 주민들이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장기 시위 중인 이곳에 가족을 찾아 나온 강주현(12·여·가명) 어린이가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주황·분홍이 어우러진 윗옷과 검은색 운동복 바지 차림인 주현이의 얼굴은 볕에 그을린 듯 가무잡잡했지만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주현이는 지난해 9월 12일, 땅이 흔들리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날
"모래 흐르던 강에 풀이 자라네"내성천은 원래 모래가 흐르는 강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제 내성천에는 고운 모래가 흐르는 대신 강바닥에 잔돌들이 쌓이는가 하면 물이 잘 흐르지 않는 곳은 풀밭으로 변해 있었다. 모래하천과 외나무다리로 유명했던 무섬마을 앞 모래밭에는 여름 관광철을 맞아 풀을 제거하기 위해 트랙터를 몰고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수몰지역 주민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강에 살고 있던 물고기의 생태계도 많이 변했다. 새끼손가락 만한 잉어과 흰수마자는 주로 내성천에서 발견되던 멸종위기 1급종
이르면 이번 주말에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출범할 예정이다. 탈핵 여론이 형성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문재인 정권은 민주적 절차를 통한 ‘탈원전’ 행보를 시작했다.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을 중단할지 말지를 결정할 공론화위원회에 다양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국가가 진행하는 중대 사안에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얼마나 제대로 반영될지 원전 관계자와 시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일 오전 10시 환경재단 레이첼카슨 홀에서 환경운동연합이 주관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어떻
‘열정과 냉정’,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열망과 절망’. 이 단어 쌍들의 공통점은 감정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영향감정’이라는 것이다. 보통 한쪽 감정이 극대화하면 할수록 상반되는 감정도 커진다. 동전이 뒤집어지듯 감정이 변하면 걷잡을 수 없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감정’은 보통 우리가 ‘관계’했을 때 생긴다. 대상에 관여하기 때문에 느끼는 정서다. 격한 ‘정서’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기도 하지만 뭉치게도 한다. 증오하고 열망하기 때문에 뭉치고, 사랑하고 절망하기 때문에 뭉친다.‘뭉치는 힘’은 대개 국가주의와 민족주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욕구는 생리적인 것에서 안전, 사랑, 인정과 자아존중, 자아실현 등 5단계로 구분된다. 4단계인 인정과 자아존중의 욕구는 모든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성취하고 싶어 하는 욕구다. 자기 존재의 인정은 자존감 향상과 삶의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에 꼭 필요한 단계이다.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우리 모두를 좌절시켰다. 이유는 다르지만 모두들 참을 수 없는 모욕감 또는 상실감을 느꼈을 터이다. 광장에 나온 촛불과 태극기는 ‘인정 투쟁’의 욕구로 결집된 집단이었다. 그들을 위한 광장
‘생각’은 ‘의식 세계’다. 그런데 인간은 의식 세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의식 세계는 어떤 경로로 갖게 된 것일까?“여러분의 삶을 성찰하는 데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겁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생각, 내 삶을 지배하는 내 생각이 어떻게 나의 것이 되었나?”홍세화 장발장은행 대표는 이 질문이 ‘생각하는 사람’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위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커피 소비 공화국. 커피 시장 2000년부터 매년 약 9% 성장. 한국 얘기다. ICO (International Coffee Organization)에 따르면 2015년 5천만 국민이 소비한 커피는 1인당 2.29kg으로 1인당 약 230잔(잔=10g)이다. 이렇게 많은 국민이 마시는 커피콩은 어디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 걸까? ‘갑질 한국 사회’에서 ‘한 잔의 여유’를 찾기 위해 마시는 커피. 하지만, 그 커피가 불공정한 ‘갑질 시장 구조’를 통해 들어온 건 아닌지 고민해본 적 있나? 잘못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대안으로 나타나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지난 10일 오전 11시 22분경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 지난해 12월에 이어 제2차 공정무역 정책토론회가 진행되던 도중 참석자 모두 숙연한 마음으로 역사적인 순간을 TV를 통해 지켜봤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우원식 의원은 “공정무역을 이야기 하는 지금, 오늘 탄핵이 우리에게 준 과제와 그 책임이 정말 크다”며, “(과거) 질곡을 끊을 수 있는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비로소 기회가 만들어졌다”고 공정무역의 앞날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이번 정책토론회를 주관한 한국공정무역단체협의회 송경용 이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확실한가?’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21세기 ‘메이비(Maybe) 세대’는 묻는다. 이에 19세기 말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림으로 답을 준다. “Nuda Veritas”(<누다 베리타스>, 벌거벗은 진실)클림트가 1897년 기존 화풍에서 벗어나 ‘비엔나 분리파(分離派, Sezession)’의 대표 주자가 된 35살 때, 그는 아직은 젊다는 소리를 듣는 청년이었다. 그런 클림트가 이끈 분리파를 한 마디로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분리파의 대표 문구를 보면
<앵커>조류독감 AI가 전염되면, 수천마리의 가금류가 살처분 돼 땅에 묻힙니다. 올해는 역대 최악으로, 피해가 심각했는데요. 어렵게 회복한 AI청정국 지위마저 잃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받은 농가들이 있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직접 현장 취재했습니다.<기자># 생활협동조합 계란, AI 피해 적어한 생활협동조합 매장에서 유정란 10개는 매장가 기준으로 3700원. 최근 AI 파동으로 10개에 오천 원까지도 치솟았던 일반 계란 가격보다 쌉니다. 한살림과 아이쿱 같은 생활협동조합에서 판매하는 계란 가격이
“국가는 사멸하지 않는다. 고로 국가는 생성되지 않는다.” 사회학자 테다 스코치폴의 말이다. 국가조직의 붕괴는 다른 국가 조직으로 대체될 뿐 국가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는 국가를 잃었다. 주권을 뺏긴 나라엔 자주권을 외칠 수 있는 목소리가 없었고, B.C. 2333년 이후 그 계통을 유지해오던 뿌리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보면 국가를 통치하는 기구와 정부가 몰락하고 다른 형태로 탄생한 것뿐, 국가 자체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고조선, 발해, 고구려·백제·신라, 고려, 조선 등 다양한 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