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영화 ‘괴물’

초등학교 고학년 소년 ‘미나토’(쿠로카와 소야)는 어머니와 함께 일본 시골의 작은 호숫가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을 ‘걸스바’(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일본의 유흥업소)에서 불이 나 소방차가 오가고 소란스럽던 어느 날, 같이 불구경을 하던 엄마 ‘사오리’(안도 사쿠라)에게 미나토는 묻는다.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그 후 사오리의 눈에는 미나토의 행동이 미심쩍다. 신발 한 짝이 없어진 채로 집에 돌아온다던가, 미나토가 스스로 자른 머리카락이 욕실 바닥에 흩뜨려져 있다든가, 사오리가 아침마다 정성스레 싸주던 물통에 흙이 가득 차 있다든가. 급기야 한밤중 어두운 터널 속에서 “괴물은 누구게?”라며 노래를 부르던 미나토를 발견한다. 미나토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미나토가 달리던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기까지 한다.

사오리는 미나토를 다그친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냐고. 미나토는 담임선생인 ‘호리'(나가야마 에이타)가 자신에게 “돼지의 뇌를 가졌다”라고 했다고 소리친다. 그 후 싱글맘 사오리의 ‘전투’가 시작된다. 학교와 교장은 얼버무리며 상황을 회피한다. ‘걸스바’에 출입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호리는 “모자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좀 유별나다”고 말한다. 분노한 사오리는 소리친다. “당신들에게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습니까?”

‘괴물’은 누구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출 사카모토 유지 각본 ‘괴물’은 제76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각본가는 ‘누구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진의 왼쪽은 요리 역의 히이라기 히나타, 오른쪽은 미나토 역의 쿠로카와 소야. 출처 미디어 캐슬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출 사카모토 유지 각본 ‘괴물’은 제76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각본가는 ‘누구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진의 왼쪽은 요리 역의 히이라기 히나타, 오른쪽은 미나토 역의 쿠로카와 소야. 출처 미디어 캐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괴물’은 같은 사건을 다른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총 세 번 플래시백(과거의 일을 회상) 하는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사오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의 눈에는 아들 미나토를 괴롭히는 사람은 담임선생인 호리이고, 학교는 이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1부는 호리 선생이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하면서 마무리됐다.

2부에서는 1부의 진실이 뒤집힌다. 미나토의 담임선생 호리의 시점에서 사실 그가 미나토를 괴롭힌 적이 없고, 오히려 미나토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호리는 되려 미나토를 동급생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를 괴롭히는 문제아로 지목한다. 호리의 눈에 비친 미나토는 가끔 분노 조절이 되지 않아 반 아이들 앞에서 난동을 피우고, 요리를 괴롭힌 범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3부는 다시 사건을 뒤집는다. 미나토와 요리는 남몰래 우정과 사랑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미나토는 교장에게 자신이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날까 봐 말할 수가 없었다”며 거짓말의 이유를 고백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의 악인이 누굴까 찾던 관객은 아이들의 순수한 사랑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여러 등장인물의 증언이 엇갈리게 묘사되는 방식은 일본의 고전영화 '라쇼몽'과 비슷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연출한 ‘라쇼몽’은 전란을 겪던 과거 일본을 배경으로 벌어진 하나의 살인사건이 어떻게 서로 다른 개인에 의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재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진실은 개인의 관점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며, 이는 인간의 이기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선택하여 기억한다. 선택의 과정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기심이 반영된다. ‘괴물’의 주요 등장인물인 사오리, 호리, 미나토의 선택은 모두 이기적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서로에게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얽히고설킨 서로 다른 시선 속에서 누가 진짜 가해자일까를 추측하게 된다. 전형적인 미스터리 형식으로 출발한 1부에서 가장 악인은 호리 선생이다. 2부에서는 호리 선생의 결백이 밝혀지며 애매한 태도로 그를 억울하게 만든 교장 선생이 악인처럼 보인다. 교장 선생 또한 자신만의 비밀을 가진 인물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말한다. 사실 절대적 악인, 괴물 같은 건 없다고. 다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

사오리가 학교 관계자들과 대담하는 장면. 출처 미디어 캐슬
사오리가 학교 관계자들과 대담하는 장면. 출처 미디어 캐슬

때론 형식이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각부마다 의도적으로 다른 앵글과 쇼트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1부의 사오리가 선생들과 대면하는 장면에서는 일부러 카메라를 기울여 사오리를 클로즈업해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2부에서는 호리 선생의 심정을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그의 시점으로 본 쇼트가 많이 쓰였다. 3부에서는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 리버스 쇼트(두 대의 카메라가 서로 마주보는 숏)를 사용해 연출했다. 다양한 기법의 연출은 관객들이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를 따라가도록 만들었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괴물’인가

사오리, 호리, 미나토는 사회적으로 차별받은 경험을 가진 약자이기도 하다. 사오리는 남편이 그의 내연녀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사망한 뒤 싱글 맘이 되었다. 자신은 혼자서 아이를 양육하지만 미나토에게는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성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자녀가 있어야 ‘정상적인’ 가정으로 취급되는 사회적 기준 때문이다. 호리는 싱글 맘 아래서 자란 성인 남성이다. 문장의 교정과 교열, 그리고 맞춤법에 집착하는 호리의 성격은 올바름이란 기준에 그가 매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나토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계에 있는 불안한 존재이고,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동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주요 등장인물 중 요리만의 시점으로 진행된 내용은 없다. 요리는 어쩌면 이들 중 가장 약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남성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 남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문제의 ‘돼지 뇌’ 발언은 요리의 아버지가 요리에게 한 말이다. 그는 요리가 괴물이고 개조 대상이라 생각해 학대한다. 남성은 여성을 좋아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들어맞지 않으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인간은 이른바 성원권(成員權)을 획득해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성원권은 ‘사회적 인정’이다.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인간은 동물로서의 종(種, species)을 뜻한다.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선 사회에 속해야 한다. 사회에 속하기 위해선 구성원들의 인정이 필요하다. 사람은 사회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인정투쟁’을 해야 한다. 인정투쟁은 사회에서 ‘멀쩡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사회의 기준과 규범에 자신을 들이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인정투쟁의 과정에서 자신의 자아와 사회의 기준이 다르다면 그 사람은 심각한 내면의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회의 기준은 내국인, 이성애자, 남성에 맞춰져 있다. 외국인, 동성애자, 여성과 장애인은 사회의 기준 밖에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에서 환대받지 못한다.

미나토가 겪는 혼란과 갈등도 인정투쟁에서 비롯된다. 청소년이 되어가는 미나토는 자신이 사회에서 환대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특히 학교라는 사회는 극명하게 ‘다름’을 배척하는 사회다. 요리는 꽃을 좋아하고 여자아이들과 어울린다. 남자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요리를 괴롭힌다.

미나토는 그런 요리를 좋아하지만, 자신도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학교에선 요리를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미나토는 두려움과 무력감, 분노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요리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멈추고자 반에서 신발주머니를 던지며 난동을 피우기도 하고, 괜스레 요리에게 화풀이하기도 한다.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사회의 인정이라면, 요리와 미나토가 사람으로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단둘이 있는 곳밖에 없다. 요리와 미나토는 마을에 버려진 기차 속에 자신들의 세계를 마련한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각종 잡동사니를 가져와 꾸민다. 같이 토스트에 잼을 발라 밥을 먹는다. 학교 글쓰기 숙제에는 서로의 이름을 담임선생인 호리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써 놓는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버려진 기차에 가기 위해선 터널을 지나야 한다. 터널을 지나고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센과 치히로’, ‘나니아 연대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 두 영화는 모두 터널을 지난 세계에서 어린아이가 여러 경험을 한 뒤 자기 자신을 찾고 원래 세상에 돌아오는 이야기다. 미나토와 요리는 새로운 세계인 버려진 기차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

아이들의 성장

요리(왼쪽)와 미나토(오른쪽)이 버려진 기차 안에서 ‘괴물은 누구게’ 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상대방의 설명만으로 자신의 카드에 그려진 것을 맞추는 놀이다. 출처 미디어캐슬
요리(왼쪽)와 미나토(오른쪽)이 버려진 기차 안에서 ‘괴물은 누구게’ 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상대방의 설명만으로 자신의 카드에 그려진 것을 맞추는 놀이다. 출처 미디어캐슬

‘괴물’은 가해와 피해의 회색지대를 드러내는 영화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을 다룬 영화기도 하다.  자신들이 사회의 낡은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 걸까. 미나토와 요리는 ‘빅크런치’(우주 탄생인 ‘빅뱅’의 반대말로 우주가 한 점으로 모여 붕괴한다는 개념)라는 우주 종말론과 함께 재탄생을 이야기한다. 미나토는 태풍이 거세게 오던 날 아버지에게 학대당해 욕조 속 찬물에 빠져있던 요리를 구한다. “빅크런치가 오고 있어!”. 미나토의 흥분한 말은 새로 태어나 마침내 사회에 속할 수 있다는 기대에 찬 한 마디다.

미나토와 요리는 산사태 발생 위험으로 출입 금지된 터널을 지나 버려진 기차로 향한다. 기차 안으로 들어가 운전석에서 다가오는 재탄생을 기다린다. 미나토를 찾으러 온 사오리와 호리는 뒤늦게 산사태로 뒤집힌 기차를 발견한다. 이미 아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이 미나토와 요리의 죽음을 암시한 것이라 주장한다. 나는 아이들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죽었다면 영화의 메시지를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뒤집힌 기차는 뒤집힌 세계를 뜻한다. 뒤집히기 전의 버려진 기차는 그들의 작은 유아기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안락한 어린 시절의 판타지적 세계다. 뒤집힌 기차 아래의 수로로 빠져나온 아이들은 맑게 갠 햇살 아래에 나온다. 요리는 미나토에게 묻는다. “우리는 새로 태어난 걸까?”. 미나토가 대답한다. “그런 일은 없어 그대로야”. 요리는 외친다. “그래? 다행이네”. 비가 그친 뒤 자라난 풀처럼, 아이들은 성장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선 환하게 갠 햇살 아래 두 아이가 뛰어간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의 달리기가 현실로부터 디즈니월드로의 도피라면, ‘괴물’ 속 아이들의 달리기는 지난한 성장통 끝의 환호다. 세상은 아직 변한 게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의 성장을 구조의 바깥에서 이뤄냈다. 이 비현실적인 성장을 영화는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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