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오프로드 야생 온천

왜 그냥 온천이 아니라 ‘야생’ 온천일까? <오프로드 야생 온천>의 공저자인 황상호, 우세린 부부는 5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광활한 자연에 숨어 있는 자연 온천 30여 곳을 여행하고, 그 생생한 경험을 책에 담았다. 그들이 다닌 야생 온천은 ‘하늘빛 욕조와 키 큰 야자수, 부드러운 목욕 가운 같은 것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죽은 이끼가 떠다니고 쿰쿰한 유황 냄새가 나며, 덤불 속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곳’이다. 조금이라도 지저분하거나 고생스러운 것에 질색하는 사람들은 돈을 쥐여 줘도 찾지 않을 장소. 그런데도 이들이 야생 온천에 푹 빠진 이유는 뭘까?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샌버나디노 국유림에 있는 딥크릭 야생 온천. 저자 중 한 명인 우세린 작가가 온천욕을 즐기고 있다. 황상호 제공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샌버나디노 국유림에 있는 딥크릭 야생 온천. 저자 중 한 명인 우세린 작가가 온천욕을 즐기고 있다. 황상호 제공

자유로운 영혼과 개방적 문화를 만나다

우선 미국의 자유로운 영혼과 개방적인 문화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나체족’이다. 작가들은 가장 흥미롭거나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책 첫머리에 내세우기 마련인데, 이 책은 야생 온천을 처음 소개하는 순간부터 나체족을 등장시킨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스라이 저 멀리, 살집이 좋은 노인의 뒤태가 보인다. 어라? 그,런,데? 사알색! 아래가 휑하다. 노팬티다! 영어로는 ‘버스데이 수트’(birthday suit). 머리에서 범종이 두웅~ 울린다.” 

미국 노천 온천에서는 나체족을 아주 쉽게 만날 수 있고, 현지 주민들도 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저자들은 놀라는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가 필수품’이라고 익살스럽게 말한다. 실제로 저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나체족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어하기도 한다. 때론 민망한 상황을 벗어나려 나체족이 드문 ‘유교적’ 탕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야생 온천의 나체족은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미국 사회 깊숙이 내재한 ‘자연주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모습 중 하나다. 자연주의는 인위적인 것을 지양하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추구하는 사상인데, 나체족은 옷을 입지 않은 태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행위라고 여긴다. 이를 위해 나체족은 ‘자연주의 행동위원회'(Naturist Action Committee)나 ‘신체자유조합'(Body Freedom Collaborative) 같은 비영리단체를 조직하고, ‘세계 나체 조경의 날’ ‘세계 나체 자전거 타기’ 등의 행사도 연다. 야생 온천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미국의 속살을 흥미롭게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가난한 여행자와 히피들의 안식처

이제 좀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차례. 미국 야생 온천은 주로 무료 노천탕으로, 상업적 가치가 떨어져 소외된 곳이 대부분이고 가난한 여행자와 히피(기성 관습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 장기 여행자가 모이는 곳이다. 책에서 저자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해당 지역의 역사와 전설, 주민들의 어제와 오늘의 삶 등 다양한 인류학적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미국인도 잘 모르는 미국 구석구석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 남부의 슬래브시티(Slab City)는 공식적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해군이 북아프리카 공격을 위해 세운 대공 포탄 훈련지가 전쟁 후 군대 철수와 함께 폐허가 됐는데, 이곳에 노숙자와 히피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텅 빈 탄약고와 무기고, 창고 등을 차지하고 살았다. 임피리얼 카운티 지역정부는 세금 한 푼 나오지 않는 이 지역을 공식 행정구역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전기와 수도 등 편의시설도 설치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세상 끝까지 밀려난 자들의 안식처가 되는 슬래브시티 온천이 있다. 겉보기엔 지저분한 물웅덩이 같지만 따뜻하게 몸을 담글 수 있는. 또 시멘트를 부어 만든 구조물에 너도나도 작은 그림들을 그리다 보니, 지금은 형형색색의 46미터(m) 대형 페인트 그림 언덕이 된 ‘샐베이션 마운틴’이 있다. 어둑해지면 나이트클럽 ‘더 레인지’에서는 마을 주민이 만든 ‘슬래브시티 송’이 흘러나온다. 지역정부가 세금도 안 내는 ‘불온한 자’들을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주민들은 예술과 연대로 저항하며 마을을 지켜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슬래브시티에 있는 대형 페인트 그림 언덕 ‘샐베이션 마운틴’. 황상호 제공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슬래브시티에 있는 대형 페인트 그림 언덕 ‘샐베이션 마운틴’. 황상호 제공

원주민의 아픔과 자연의 눈물이 고인 곳

야생 온천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오랜 세월 신성하고 평화로운 장소로 여겨왔지만, 미국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학살과 차별, 배제의 경험으로 인한 슬픔 또한 고여 있다. 캘리포니아 중부 컨강(Kern River) 주변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요쿠츠족과 카와이수, 튜바투라발 부족이 수천 년 동안 살아왔는데, 1800년대 중반 컨강 하류에서 사금(모래 속에 섞인 금)이 발견되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서부 개척에 눈이 먼 에스파냐 정착민과 캘리포니아 기병대가 개발에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원주민들은 결국 고향에서 수십 킬로미터(km) 떨어진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이주했다가, 개발 열풍이 수그러든 1800년대 말이 돼서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사금 채취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금광업자들은 대신 온천을 개발했다. 이 지역의 ‘레밍턴 온천’ ‘미라클 온천’ 등은 지금도 신선한 수질과 치료 효과로 사랑받지만, 그 속에는 원주민의 눈물과 설움이 흐르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오프로드 야생온천 표지. 황상호·우세린 작가가 5년 동안 미국의 자연 온천 30여 곳을 직접 찾아다닌 후 집필했다. 지성사 제공
오프로드 야생온천 표지. 황상호·우세린 작가가 5년 동안 미국의 자연 온천 30여 곳을 직접 찾아다닌 후 집필했다. 지성사 제공

미국의 지역 불균형과 환경 파괴 현장도 저자들의 눈에 띄었다. 물 자급률이 30퍼센트(%)도 안 되는 대도시 로스앤젤레스(LA)가 캘리포니아 북부지역의 물을 끌어다 쓰느라, 그 지역 지하수가 줄어들고 호수가 얕아졌으며 녹지도 계속 줄고 있다. 생태계 파괴 때문에 인요(Inyo) 카운티의 한 온천은 ‘더러운 양말 냄새가 난다’고 해서 ‘더티삭스 온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물 부족 도시 로스앤젤레스는 집마다 스프링클러로 잔디를 키우며 물을 펑펑 쓰고, 빗물을 저장하는 대규모 사업엔 진척이 없다고 저자들은 안타까워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만나고 싶다면

이쯤 되면 저자들이 미국의 야생 온천 여행에 빠진 이유에 적잖이 공감하게 된다. 야생 온천은 미국 곳곳의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 고통을 겪은 후에도 일상의 행복과 자유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에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소비 위주가 아닌 사람과 지역, 자연에 관심을 둔 윤리적 여행을 할 수 있었고, ‘보고(seeing) 듣는(hearing)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observing) 귀 기울이는(listening) 여정’을 기록할 수 있었다. 거친 오프로드(비포장길)를 승용차로 무리하게 진입했다가 오일탱크와 타이어가 터져 끝내 폐차하거나, 온천 근처 캠핑장에 출몰한 야생곰에게 유기농 청포도를 고스란히 내어주는 등의 아찔한 경험은 덤이다. 

황상호 작가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에서 공부하고 CJB청주방송에서 7년 동안 방송기자로 근무했으며, 미국으로 이주해 <미주중앙일보> 기자, 환경매체 <뉴스펭귄> 특파원으로 일했다. 우세린 작가는 경기방송 기자 출신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황 작가는 책에서 “나는 거주지를 옮길 때면 꼭 그 지역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다”며 “그것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예우이자 내 삶을 밀도 있게 살기 위한 기획”이라고 말했다. 청주방송 기자 시절, 그는 서울에서 충북지역에 이주해 사는 14인의 예술가들을 인터뷰해 <내 뜻대로 산다>를 출판하기도 했다. 지금은 로스앤젤레스 거리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을 조명하는 ‘황상호의 골목길 갤러리안’을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연재하고 있다. 

“여기까지 걸어오기 힘들지만 여기 오면 진짜 캘리포니아를 만끽할 수 있어. 개발되기 전 그대로의 모습 말이야. 초록빛 온천을 봐봐,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지. 운 좋으면 걷다가 뿔이 큰 빅혼십(Big Horn Sheep, 산양의 일종) 무리를 볼 수 있어.”

캘리포니아 남부 벤투라 카운티의 월렛 온천에서 저자들이 만난 하이커(도보여행자) 세라의 말이다. 미국의 대자연에서 세라가 만끽한 즐거움을 당장 느껴보고 싶다면, 지금 <오프로드 야생 온천>의 책장을 펼쳐도 좋을 것이다.

황상호, 우세린 작가와 아들이 함께 책을 들고 있는 모습. 황상호 제공
황상호, 우세린 작가와 아들이 함께 책을 들고 있는 모습. 황상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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