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든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생태계를 이루는 인간 외의 생명체들을 만든다. 형은 동생에게 모든 존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재능을 하나씩 부여하라고 명한다. 사슴에게는 천적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가늘고 날렵한 다리를, 늪에서 먹이를 구하며 사는 악어에게는 억센 이빨을 부여한다. ‘뒤늦게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인 에피메테우스는 그만 인간에게 줄 능력을 깜빡하고 만다. ‘앞을 내다보는 자’인 프로메테우스는, 아무 재능이 없는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며 살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신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다. 인간은 프로메테우스 덕분에 음식을 익혀 먹고,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건지며 문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인간은 불을 사용해 무기를 만들어 서로를 공격하고 죽이는 어리석은 짓도 일삼았다. 인간이 신의 권위에 도전하게 만들고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프로메테우스는 세상 끝 절벽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게 된다.

물리학 원리보다 복잡한, 인간에 대한 질문

영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펜하이머>가 지난달 15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영화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다룬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한다. 한국 관객에게 크리스토퍼 놀란은 친숙한 이름이다. 천체 물리학 등 과학에 대한 학문적 이해도가 높은 그는 <인터스텔라>, <테넷>과 같은 작품에서 어려운 개념을 가지고 관객에게 거침 없이 말을 걸었다. <메멘토>, <덩케르크>와 같은 작품에서는 복잡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해 냈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감독의 세계관이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완성하고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영화 예고편 갈무리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완성하고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영화 예고편 갈무리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고 미국의 아들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한 국가적 영웅이다. 1942년 미 육군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는 끝까지 저항하는 일본과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 상황을 원자폭탄으로 끝내고자 오펜하이머를 찾아온다.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자리를 수락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고향, 로스앨러모스 사막 한가운데에 연구소를 설립한다. 그는 그로브스와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할 과학자들을 섭외하러 다닌다. 학문적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애국심을 내비치는 방식으로 그는 과학자들을 설득한다. 개성 강한 사람 여럿이 협업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뛰어난 리더십도 발휘한다. 마침내 원자폭탄이 완성되고 미국은 폭탄을 일본에 투하한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게 된다.

감독은 세 개의 시간대를 사용해 영화의 내용을 풀어간다.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까지의 시간, 종전 후 오펜하이머가 그의 비밀취급인가를 취소하기 위해 열린 모욕적인 비공식 청문회를 견디는 시간, 상무장관직 확정을 눈앞에 둔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상원 인준 통과를 기다리는 시간, 이렇게 각각 다른 시간대가 순서에 상관없이 섞여서 영화를 구성한다. 모든 시간대 속에서 관객은 오펜하이머를 응원하게 된다. 오펜하이머가 핵분열 발견 소식을 듣고 들뜬 모습일 때는 천재의 비범함에 감탄하고, 모욕적인 청문회를 견딜 때는 그의 억울함이 풀리길 바라게 된다. 오펜하이머와 오랜 악연으로 엮인 스트로스가 상원 인준을 받지 못했을 때는 통쾌함 마저 느낀다.

긴 형벌로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는 폭탄 투하 후 더 많은 핵무기를 만들어 국력을 강화하자는 정부의 제안에 강한 회의를 내비친다. 동료 과학자의 수소폭탄 제조도 지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언행은 바로 국가의 미움을 사고, 그의 비밀취급인가 취소 여부를 두고 비공식 청문회가 열린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공산주의자 지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평소에 교수에게도 노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 적도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 정부가 그의 이른바 ‘급진적’ 사상을 약점으로 잡아 쉽게 다루기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맡긴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두 번의 청문회가 열린다. 각각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가 대상이다. 영화 예고편 갈무리
영화에서는 두 번의 청문회가 열린다. 각각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가 대상이다. 영화 예고편 갈무리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사상이나 행동은 국가 안보를 위협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공격을 당하는 빌미를 제공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가 청문회에 불려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원자폭탄이 종전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수의 민간인 사상자만 발생시킨다면 투하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폭탄의 존재를 알려 동맹국에는 협조를 요청하고, 적국에는 항복을 유도하는 방법도 있다고 주장했었다. 이런 그를 모욕적인 비공식 청문회 자리에 앉힌 사람은 다름 아닌 스트로스였다. 방사능 동위원소를 외국에 수출하는 문제를 두고 스트로스는 핵무기 개발에 쓰일 것을 염려해 반대했고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개발에는 ‘삽도 필요하고 맥주도 필요하겠죠’라며 스트로스를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스트로스가 준비한 복수가 바로 비공식 청문회였던 것이다.

한때 영웅으로 대접받고 스스로를 ‘죽음의 신’이라 부를 정도로 자부심이 있던 사람이 견디기에는 청문회는 너무 괴로운 시간이었다. 결국 비밀취급인가는 취소되었고 오펜하이머의 사회적 입지는 엄청나게 좁아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스트로스가 상원 인준을 기다리는 자리에서 오펜하이머와의 악연은 스트로스의 발목을 잡는다. 모든 내막을 알고 있었던 데이비드 힐(라미 말렉) 박사의 증언으로 이른바 ‘오펜하이머 사태’가 개인의 복수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스트로스는 힐 박사가 오펜하이머와 과거 의견 충돌이 있었던 점을 들어 막연히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힐 박사는 그저 자신의 기준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 오펜하이머와 의견 대립은 힐 박사에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었고 스트로스 편을 들어줄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원자폭탄이 터지며 발생하는 화염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선물한 불을 연상시킨다. 영화 예고편 갈무리
원자폭탄이 터지며 발생하는 화염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선물한 불을 연상시킨다. 영화 예고편 갈무리

불, 핵분열, 오펜하이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불’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다. 불이 악하다거나 선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불이라는 도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기(利器)로도 흉기(凶器)로도’ 쓰일 수 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작가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원자폭탄이라는 도구를 인간에게 선사한 오펜하이머를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원자폭탄 투하가 세계 평화가 아닌 위태로운 핵무기 질서를 불러일으킨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치중립적인 도구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핵분열’이라는 발견 그 자체다. 인간은 핵분열 원리를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 사용했고 원자력 발전에도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 속에서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 아인슈타인을 찾아간다. 핵분열이 연쇄작용을 일으키면 지구가 전부 불타버릴지 모른다며, 동료 과학자가 계산한 수식을 보여주며 조언을 구한다. 실험에서도 증명했듯 핵분열의 연쇄작용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종전 후에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을 재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파멸의 연쇄작용, 시작된 것 같아요.” 오펜하이머는 스스로가 실제 여러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원자폭탄 투하 후에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신으로부터 파멸의 연쇄작용이 시작되었다는 표현은, 죄책감을 포함한 그가 지닌 복합적인 감정들이 드러나는 말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과 대화 후 연쇄작용에 대해 곱씹는다. 영화 예고편 갈무리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과 대화 후 연쇄작용에 대해 곱씹는다. 영화 예고편 갈무리

오펜하이머는 그 스스로가 무기 개발 프로젝트에는 이용당하고 쓰임이 다한 뒤에는 무참하게 외면당한 또 다른 도구이기도 하다. 도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인물 데이비드 힐 박사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힐 박사는 오펜하이머처럼 스스로 신이 되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지혜로운, 상식적인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다. 원자폭탄의 위력이 불러일으킬 파국을 막고자 서명을 받으러 다녔고, 과학자가 개인의 의견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자유를 구속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스트로스의 상무장관 임명을 막았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가장 마지막에 기억할 인물은 데이비드 힐 박사다. 그는 현명한 인간이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비범했을지언정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