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유해성 출판물 폐기” 민원에 공공도서관들 대응책 고심

일부 학부모단체가 대출 금지와 폐기를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한 도서들. 성교육 관련은 물론 어린이 인권에 대한 책도 있다. 조벼리 기자
일부 학부모단체가 대출 금지와 폐기를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한 도서들. 성교육 관련은 물론 어린이 인권에 대한 책도 있다. 조벼리 기자

최근 경기와 충청 일부 지역에서 성교육이나 페미니즘, 인권 관련 도서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면서 충북 제천의 일부 공공도서관이 사실상 해당 도서 열람을 제한하는 등 도서관 운영이 영향을 받고 있다. 지난달 초 전국학부모연합회 소속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개인과 충북 청주에 있는 시민단체 ‘행동하는학부모연합회’ 대표가 제천시의 공공도서관들에 일부 도서에 대한 ‘열람 제한, 대출 금지, 폐기’를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이들이 유해도서라며 목록을 제시한 도서는 모두 117종에 달한다.

충청 지역에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단체들은 경기 지역 학부모단체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이하 다학연)’이 제작한 성평등·인권 관련 “문제 도서 목록”이 담긴 인쇄물을 지역 내 학부모들 사이에서 공유했다. 다학연이 만든 인쇄물에는 지역별 도서관에 비치된 도서 목록과 “학교 도서관이나 지역 도서관에서 위와 같은 책들을 확인하고 유해한 도서는 뺄 수 있도록 건의해달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단비뉴스> 취재 결과 관련 민원은 지난달 6일 제천기적의도서관에 처음으로 접수됐고, 나흘 뒤인 지난달 10일에는 제천시내 공공도서관에 비치된 성교육 관련 도서들이 아이들에게 유해하다는 내용의 민원이 제천시립도서관에도 접수됐다. 12일에는 학부모 2명이 제천기적의도서관에 직접 찾아와 “아이들이 많이 오는 도서관에 이 도서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도서 117종의 열람을 제한하도록 도서관 측에 요구했다.

지난달 26일 기자가 제천기적의도서관 자료검색대에 민원이 제기된 도서들을 일일이 검색한 결과 유해도서목록에 포함된 도서 61권 중 51권이 '대출 중'으로 대출이 안 되는 상태였다. 도서관 측이 검토를 위해 모두 대출 처리했기 때문이다. 조벼리 기자
지난달 26일 기자가 제천기적의도서관 자료검색대에 민원이 제기된 도서들을 일일이 검색한 결과 유해도서목록에 포함된 도서 61권 중 51권이 '대출 중'으로 대출이 안 되는 상태였다. 도서관 측이 검토를 위해 모두 대출 처리했기 때문이다. 조벼리 기자

민원이 제기된 도서 가운데 제천기적의도서관이 보유한 도서들을 검색하면 자료 상태가 ‘대출 중’으로 ‘대출불가’ 표시가 뜬다. 제천기적의도서관 관장은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유해 도서 목록에 있는 책들은 학부모 책 모임이나 활동가 등 다양한 지역사회 구성원과 보고 있는 중이어서 대출 중으로 표시해놓았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한쪽의 의견,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책을 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민원이 제기된 책들 중에서 제천기적의도서관을 제외한 다른 제천지역 공공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은 지금도 대출이 가능하다.

제천시교육청 소속 학부모단체인 제천시학교학부모연합회 서록희 회장은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단체는 제천시에 있는 학교들의 학부모 단체 회장단의 모임인 제천시학교학부모연합회와 논의한 바가 없다. 기존 간행물들은 이미 윤리위원회를 통과해 엄선한 도서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서를 빼라고 주장하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유니세프가 들려주는 어린이 권리”가 유해성 출판물?

경기 구리시의 학부모단체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이 제작한 “우리 아이 도서관에서 살아남게 하기” 책자의 일부. 출처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
경기 구리시의 학부모단체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이 제작한 “우리 아이 도서관에서 살아남게 하기” 책자의 일부. 출처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

제천시 공공도서관에 민원이 접수된 유해도서목록에 들어있는 도서 117종은 성교육, 페미니즘, 인권을 주제로 한 책들이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된 그림책 <꽃할머니>, 어린이 구호단체 유니세프가 세계 어린이들의 인권 유린 실태와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다룬 <유니세프가 들려주는 어린이 권리>도 유해도서목록에 포함됐다.

제천 외에도 민원이 제기된 충남 서천, 홍성 등에는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이 제작한 책자도 유포됐다. 충남도의회 지민규 의원은 지난달 25일에 열린 본회의에서 다학연이 제작한 "우리 아이 도서관에서 살아남게 하기" 책자를 언급하며 “학부모단체가 도내 모든 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성교육 관련 도서를 다 읽어보고 유해도서목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지 의원은 학부모단체가 만든 ‘유해도서목록’에 수록된 도서들이 100여 종류로 시작해 153개 도서로 늘었다고 덧붙였다.

경기와 충청 지역에 유포된 책자를 만든 다학연은 경기 구리시에서 활동하는 학부모단체다. 다학연은 지난 1월 경기도교육청을 찾아가 이 책자에 실린 도서들을 포함한 성교육·인권 관련 도서들을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지 않도록 각 학교에 공문을 발송해달라고 요청했다. 서윤경 다학연 대표는 지난달 31일 <단비뉴스>와의 통화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르치는 게 성교육인데 오로지 생식기의 차이점을 알려주는 교육을 하다 보니 아이들의 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학연이 제작한 책자는 ㈜미래엔이 출판한 도서의 만화 캐릭터를 사전 동의 없이 사용한 것이 문제가 돼 지난 6월 인쇄물 사용 금지 조치가 취해졌다. 하지만 저작권 침해로 사용 금지 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 서울과 경기, 충청 지역에서 1000부가 배포되고 온라인 맘카페에도 유포됐다. 서윤경 대표는 이와 관련해 “(책자를 달라고) 학부모단체, 교육자들 등이 연락이 왔다.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인쇄비만 받고 보내드렸다”고 말했다.

제천시 공공도서관에 제출된 유해도서목록에도 다학연이 제작한 불법 인쇄물에 수록된 도서가 대부분 포함됐다. 그중에는 2020년 여성가족부가 “나다움 어린이책 교육문화사업(이하 나다움책)”으로 선정해 논란이 된 책들도 있었다. 그해 8월 국회에서 국민의힘 김병욱 의원이 일부 도서가 아이들에게 조기성애화를 조장한다며 문제를 제기하자 여성가족부가 5개 학교에 보급한 나다움책 7종을 회수하면서 사업이 조기 종료됐다.

나다움책 사업은 여성가족부와 롯데지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성과 공존을 지향하는 도서를 선정해 학교 도서관에 보급하는 사업이다. 경기·충남·충북 지역에서 민원이 제기된 유해도서목록 가운데 나다움책은 국제아동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작가 페르닐라 스탈펠트의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1971년 출간돼 덴마크에서 아동도서상을 수상한 페르 홀름의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이 있다.

충남도, 공공도서관에 도서 7종 열람 제한 조치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 6월부터 민원이 제기된 유해도서목록에 포함된 책들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릴레이 성평등 책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 6월부터 민원이 제기된 유해도서목록에 포함된 책들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릴레이 성평등 책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

충남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성평등·인권 도서를 대출 제한 및 폐기해달라는 민원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자 지난달 25일 김태흠 충남도지사는 “충남 36개 도서관에서 도서 7종의 열람을 제한했다”고 밝혔다.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단체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 것이다. 이에 충남 지역 시민단체들이 충남도지사의 발언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며 논란이 커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충남 홍성에 있는 시민단체 꿈키움성장연구소가 충남 지역 공공도서관에 성평등·인권 관련 도서의 폐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꿈키움성장연구소는 공문에서 “다양성, 사회문화적 성, 성인지 감수성 등을 근거로 동성애, 성전환, 조기성애화, 낙태 등을 정당화하거나 이를 반대하지 못하게 하는 도서는 폐기 처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원이 반복되자 충남지역 일부 공공도서관은 잠정 조치로 관련 도서 열람을 중단했다.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 6월부터 충남지역 시민단체 활동가와 시민들을 대상으로 민원이 제기된 유해도서목록에 포함된 책들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릴레이 성평등 책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장주진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가는 “처음 열린 책담회에 시민단체 활동가와 시민 25명이 참여했다. 책담회에 온 분들은 도서관은 공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책을 비치하고 대출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충남도의회 본회의에서 지민규 의원이 언급한 유해도서목록 책자 표지. 출처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
지난달 26일 충남도의회 본회의에서 지민규 의원이 언급한 유해도서목록 책자 표지. 출처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

지난달 25일 충남도의회 본회의에서 지민규 의원은 김태흠 충남도지사에게 충남 도내 학교도서관과 공공도서관들의 성교육 도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질의했다. 지 의원은 긴급현안질문을 통해 “도내 도서관에 비치된 일부 성교육·성평등 도서에서 과도하게 표현된 일부 그림과 글들이 아이들에게 부적절한 성적 자극을 준다”고 주장했다.

댭변에 나선 김 지사는 관련 도서 7종을 도내 36개 도서관 전체에 열람을 제한하겠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여성가족부에서 회수 조치한 7종의 도서를 살펴보았는데 낯 뜨거운 표현이 대부분으로 아이들의 교육 목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연령대, 수용성 등을 감안해 도내 36개 도서관 전체에 열람을 제한했다”고 말했다.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다음날인 26일 “성교육 도서 금지는 헌법과 국제인권조약 위반”이라며 김태흠 지사의 성평등 도서 열람 제한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민주주의는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책을 읽을 권리를 보장한다. 공공도서관에서 시민의 도서접근권을 제한하는 조치는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 출판, 학문, 예술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지적했다.

“도서관의 권리와 출판의 자유 침해하는 민원은 중단돼야”

현재 충남·충북 지역 도서관들은 성교육·성평등 일부 도서의 대출 제한과 폐기를 요구하는 민원에 공동 대응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백영숙 제천시 하소아동복지관 내보물1호도서관 관장은 “대출 금지는 책을 읽고자 하는 다른 아이의 선택을 막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자칫하면 도서관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천시에서 어린이돌봄센터를 운영하는 권순애 우리돌봄놀이터 센터장은 “아이들에게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에서 방대한 정보를 접하면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이미 성 관련 지식을 갖추기도 한다. 성에 대한 부분은 아이들이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기준점을 잡아서 책을 엄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판계는 성교육·인권 관련 도서의 폐기를 요구하는 민원은 “도서관의 권리와 출판의 자유 침해”라며 우려를 표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지난달 27일 입장문에서 “도서관과 사서는 ‘도서관인 윤리선언’에 기반하여 개인의 사상과 편견을 배제하고 공공의 유익을 위해 도서를 선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도서들을 유해도서라 명하고 접근을 제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고 도서관과 사서에게 자기검열을 강요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한국출판인회의도 같은 날 “최근 충청지역 도서관에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는 민원은 국민에 대한 자유로운 도서 제공의 의무와 권한을 가진 도서관에 대한 부당한 압력이다.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저작자의 권리를 훼손할 수 있는 무분별한 도서 열람 제한 및 폐기 처분 민원은 중단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제천시립도서관, 제천기적의도서관, 신백아동복지관 한울타리도서관, 하소아동복지관 내보물1호도서관, 하소생활문화센터 산책도서관은 간행물윤리위원회에 도서 117종의 도서출판물 유해성 여부에 대한 심의 의뢰서를 접수하고 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도서관협회와 공공도서관협의회도 이와 관련한 공동 성명을 낼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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