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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겼던 나를 드러내며 해방감 느꼈죠”
[단비인터뷰] 주목받는 장애인 연극배우 백우람
2019년 09월 13일 (금) 23:34:30 김유경 기자 nanchohyanggi@gmail.com

“첫 무대에 섰을 때 기억은 지금도 아찔해요. 중간에 말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너무 긴장한 탓인지 식은땀이 줄줄 나고... 울어버린 거죠. 마침 회상신이 나와 조명이 꺼졌는데, 그 이후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정오의 땡볕이 맹렬했던 지난 6월 13일 서울 혜화역 부근의 한 카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탁자에 놓고 기자와 마주 앉은 연극배우 백우람(36)씨는 단어 하나하나에 꾹꾹 힘을 주며 ‘첫 무대’를 회상했다. 말을 할 때마다 미간과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찡그리거나 웃는 표정이 교차했다. 뇌병변장애로 움직임과 말하기에 불편을 겪는 백씨는 최근 크고 작은 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으며 개성 있는 배우로 주목받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날 만남에 이어 지난 12일 이메일 추가 인터뷰 등으로 그의 ‘배우 도전기’를 취재했다.

남의 눈길 피했던 청년, 무대에 오르다

   
▲ 서울 혜화역 부근의 한 카페에서 첫 무대의 아찔했던 경험을 말하며 웃는 연극배우 백우람씨. 탁자엔 그가 직접 쓴 연극 대본 <한달이>가 놓여 있다. ⓒ 김유경

첫 공연을 끝낸 후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던 그는 놀랍게도 다음 무대부터 ‘훨훨 날아다니듯’ 기량을 펼쳤다고 한다. 그때가 2007년이고, 그는 이제 13년 차 중견배우로 성장했다. 하지만 백씨가 원래부터 연극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던 그는 졸업 작품으로 자신의 ‘세미 누드(반 노출 사진)’를 보조 장치를 이용해 직접 찍었는데, 이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다른 발상’을 하게 됐다.

“그전까진 주목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버스를 탈 때든, 어디를 가서든 제 몸 때문에 늘 눈에 띄었어요. 그게 싫어서 되도록 저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조명에 비친 제 몸을 보니 ‘좋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자신의 신체를 내보이며 해방감을 맛본 그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 자신’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장애인 국토순례단에서 사진을 찍다 극단 ‘애인’의 김지수 대표를 알게 되고 극단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애인은 장애인 연극을 선보이는 국내 10여 개 극단 중 하나다. 연극, 무용, 축제 등 장애인 예술 활동이 활발한 유럽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국내에서도 최근 장애인 전문 예술단체가 늘어나는 추세다.

따돌림과 학대의 상처를 작품으로 치유

무대에 서면서,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눈동자들과 담대하게 마주하는 용기를 키웠다. 그리고 성장기의 상처를 서서히 치유해가고 있다. 백씨는 특수학교 대신 일반 초중고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때 몇몇 아이들에게 수시로 따돌림과 모욕,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목숨을 끊는 도구를 구한 일도 있다.

“결심을 하려는 순간,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이후 부모님이 알게 되고 학교에서 조치가 취해져 괴롭힘은 끝났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은 오래도록 상처로 남아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요즘 <비극>이라는 제목의 1인극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교복을 입은 주인공이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그가 연극 대본을 쓰는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한달이>라는 작품을 써서 무대에 올렸고, 지난 6월 28일 제 14회 나눔연극제에서 이 작품으로 남자연기상을 받았다. 극단 애인에는 최우수상을 안겼다.

   
▲ 배우 백우람씨가 대본을 쓴 연극 <한달이> 공연 장면. 함께 사는 세 장애인 남성이 우연히 아기를 한 달 간 맡아 키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 극단 애인

‘장애를 지닌 세 남자의 육아도전기’ 대본도

‘한달이’는 극 안에서 생후 6개월짜리 아기다. 장애 생활 시설 선후배 사이인 세 남자는 한집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대문 앞에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니 한 달만 돌봐 달라’는 쪽지와 함께 아기를 발견한다. 백씨가 연기한 뇌병변장애인 영철은 보살필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처음에 반대하지만, 결국 아기를 돌보게 되면서 ‘버려지기도 하고, 보호받기도 했던’ 자신의 과거와 마주한다. 백씨는 “외국영화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장애인 이야기로 써봤다”고 소개했다.

백 씨는 이 작품 외에 지난 2013년 장애인·비장애인이 함께한 제 13회 밀양여름공연축제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블라디미르역으로 남자연기상을 받는 등 차곡차곡 수상기록을 쌓고 있다. <너는 나다> <2015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 <전쟁터 산책> 등 연극 외에 <동학, 수운 최제우> 등 단편영화에도 출연했다.

   
▲ 2013년 밀양 여름 공연 축제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 역을 열연하고 있는 배우 백우람씨(오른쪽). 이 작품으로 남자연기상을 받았다. ⓒ 극단 애인

그는 “무대에서 연기하다 죽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은 그가 연극을 그만두고 안정된 직장을 얻기 바라지만, 그래도 경제적으로 그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무대 위의 자신을 사랑하며,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쓴 대로 ‘늘 마지막처럼’ 무대에 혼신의 힘을 쏟아붓는다고 고백했다. “깜깜한 객석에서 집중해주는 관객들의 시선을 느끼며 에너지를 얻는다”고 말할 때, 그의 모든 얼굴 근육이 일제히 움직이며 ‘천진하고도 행복한 웃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편집 : 신수용 기자

[김유경 기자]
단비뉴스 환경부, 기획탐사팀 김유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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