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수 언론들 연합해 선정·정파 언론 추방 노력
한국 진보언론도 보수언론 여론 독과점 견제 나서야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두 사람이 세계 언론계를 쥐어흔들고 있다. 루퍼트 머독과 줄리언 어산지. 언론 관련 사업체 700여개를 거느린 언론제국의 황제와, 뭔가 구린 데가 있는 세계 주요 인사·정부·기업·단체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이름이다. 도청과 해킹이 주요 사업수단이었지만, 한쪽에는 비난이, 다른 쪽에는 칭송이 빗발친다. 수집한 정보를 한쪽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쪽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영국을 방문한 기회에 신문을 수집하고 방송을 모니터링하다 보니 영국에서 발발한 ‘미디어 전쟁’이 국제전으로 치닫는 모습을 실감나게 목격한다. 한국 신문을 주로 볼 때는 머독이 도청의 주역인 <뉴스 오브 더 월드>를 폐간하고 꼬리를 내린 줄 알았는데, 그렇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68쪽으로 만든 폐간호마저 반성하는 내용은 몇 줄뿐이고 자신들의 보도 태도와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용으로 방대한 지면들을 다 채웠다. 프레이저 넬슨은 고별 칼럼에서 “(우리가 사라진 뒤) 위선적 정치인과 도시의 불법 외국인 고용주, 정직하지 못한 스포츠맨들이 좀더 쉽게 숨쉴 것”이라고 썼다. 자매지 <더 선>과 함께 ‘페이지 3걸’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매호 빠짐없이 제3면에 벌거벗은 여인을 등장시켜왔던 전통에 대해서도 ‘페이지 3걸들이여, 안녕’ 하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더 선>의 일요판 형태로라도 복간하지 않을까 예상된다.

한국 신문의 대체적 분석과 달리, 치명타를 입는 쪽은 머독의 세습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선출권력과 관료들일 가능성이 크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머독의 깊숙한 유착관계가 드러나고 있고 도청을 눈감아준 런던경찰청장 등은 이미 사임했다. 머독은 대처와 캐머런의 보수당정권 탄생에 일등공신이었고, 우경화한 블레어의 노동당정권 탄생에도 크게 기여했다. 영국에는 ‘총리가 두 군주를 모신다’는 말까지 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여왕과 ‘군림하지 않되 통치하는’ 왕, 곧 머독을 지목한 말이다.

머독은 영국 신문시장의 37%를 장악하고 위성방송 등에도 진출했다. 정치인들은 머독 제국을 비판했다가 찍히면 선거 때 보복 보도로 낙선하는 경우가 많아 몸을 사린다. <업저버>에 쓴 칼럼에서 헨리 포터는 “30년 이상 머독에 의한 머독을 위한 정치왜곡이 관습화했다”고 개탄했다.

‘미디어 전쟁’에 대한 한국 신문 보도의 한계는 대체로 강 건너 불 보듯 외신 번역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신문의 정파성과 보수언론의 여론 독과점이 영국보다 더 심각한데도 진보언론은 사실 전달에 치중하면서 ‘자신의 문제’로 의제를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70% 정도 신문시장을 점유한 조중동이 각종 특혜를 받으며 방송까지 장악할 기세인데 생존의 위협을 느껴야 할 진보언론은 ‘미디어 전쟁’의 전선 확대에 소극적이다.

사실 도청을 계기로 시작된 ‘미디어 전쟁’은 머독 신문들이 오래전부터 신문시장을 교란하고 영국의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해온 <가디언>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거기에 <인디펜던트> <비비시> <뉴욕 타임스> <시엔엔>(CNN)이 가세했는데, 모두 머독 매체들과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인디펜던트>는 머독의 <더 타임스> 인수 때 쫓겨난 기자들이 설립해 구원이 남아 있고, <비비시>는 머독의 위성방송 완전 인수가 눈엣가시였다. <뉴욕 타임스>는 같은 지역 신문인 머독의 <월스트리트 저널>, <시엔엔>은 <폭스방송>의 공세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그레셤의 법칙대로 나쁜 매체들에 의해 시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좋은 매체들이 연합전선을 펴는 형국이다.

<가디언>은 <뉴스 오브 더 월드>에 대한 ‘언론소비자 운동’을 상세히 보도하고 대기업 광고주 명단을 싣기도 했다. 사주의 이익을 위해 언론윤리마저 팽개치고 도청을 한 행위에 격분한 시민들은 대기업에 광고 중단을 호소해 대거 광고를 빼게 했다. 한국의 법원은 소비자 운동에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영국에는 시민이 기업의 횡포에 맞서는 유일한 수단에 제동을 거는 데가 없었다.

언론이 다른 언론의 비리를 폭로하는 사례는 유럽에서 드물지 않다. 동업자 의식이 강한 한국과 달리, 유럽 언론은 ‘민주주의 파수꾼’이라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인 듯하다. 올봄에는 독일 주간지 <슈피겔>이 독일 최대 신문이자 우파 선동지인 <빌트>가 자사 이익을 위해 어떻게 정경유착을 해왔는지 등을 파헤치는 탐사보도팀을 구성했다.

<한국방송>(KBS) ‘도청 사건’도 언론이 지켜야 할 기준에 충실하기보다 자사 이익에 쉽게 빠져드는 한국 언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공영방송이기에 영국 상업신문의 도청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던진다. 영국 신문은 그나마 보도를 위해 무리한 방법을 동원한 거지만, <한국방송>은 수신료 인상이라는 자사 이익을 위해 도청을 했다.

불법 도청 자료를 여당 의원에게 넘긴 것은 정경유착의 관점에서 보면 도둑이 장물아비에게 ‘물건’을 넘기는 것보다 더 문제가 크다. 한국방송 기자들은 수신료 인상에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내년 총선 때 보자”며 윽박질렀다고 한다. 취재윤리는 고사하고 이미 정치를 하고 있었다. <한겨레>는 상부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주로 그걸 문제 삼았지만 자발적으로 했다면 더욱 큰 문제다. 조직문화에서 비롯되는 자발성은 때로는 언론에 독약이 된다. 머독 계열 언론사 237개 전부가 이라크 침공을 지지한 것은 누구 지시를 받고 한 게 아니다.

머독은 회사 간부들이 도청 사실을 몰랐다고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지만, <가디언>의 제이 로센은 머독 언론사들의 조직문화가 진정한 원인이라고 썼다. 도청을 사주한 리베카 브룩스를 문책하기는커녕 32살에 편집국장을 시키는 풍토에서는 너도나도 도청에 나서기 마련이다.

한국의 진보언론은 미디어 환경을 건전하고 균형되게 유도할 책무가 있다. 그것은 생존의 조건이기도 하다. ‘미디어 전쟁’을 벌일 계기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의지가 있으면 계기가 보이는 법이다. <한겨레>는 최근 미국 항소법원이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다시 불허하는 판결을 내린 사실도 보도하지 않았다. 우리 언론법 개정 때 정부여당이 본보기로 여겼던 조항이다. 지난 22일은 언론법 날치기 통과 2주년이 되는 날이었으나, 아무런 기사도 내보내지 않았다.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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