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밥, 밤, 황홀

▲ 고하늘 PD

흰 투표용지에 새빨간 인주를 찍던 첫 투표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황홀하다.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된듯한 기분과 내게 주어진 권리에 대한 묘한 성취감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72년 중 20여 년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했다. 1대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국회에서 간선제로 당선되었다. 유명한 발췌 개헌으로 직선제로 변경되었으나 제2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면서 다시 국회가 대통령을 뽑았다.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고 군정 뒤 직선제로 개헌했으나,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를 뒤집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세워 간선을 시행했다. 제5공화국에서는 전두환이 '대통령선거인단'으로 이름만 바꿔 체육관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을 뽑았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군부와 맞서 싸우던 투사들의 피와 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국가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과 희생을 감수했다.

역사 공부를 게을리 한 탓이었을까. 우리는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또 무고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경기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4대강 사업을 졸속으로 추진하며 한반도의 생명줄을 끊어놓았다. 국가권력을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해 남발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권력의 주인인 국민에 의해 탄핵당했다. 이들은 바른말 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언론을 장악하여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았다. 지난 10년, 우리의 민주주의는 달빛을 가린 어두운 밤과 같았다.

기나긴 어둠을 밝혀나간 주체는 다시 국민이었다. 국민은 피와 땀으로 지켜낸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촛불을 밝혀 적폐세력을 몰아냈다. 촛불이 만든 대통령이 탄생했으며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돌이켜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도 박근혜 전 대통령도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투표로 선출됐다. 대통령 직선제로 표출된 국민의 뜻이었다. 이는 지금의 민주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좀 더 성숙해지려면 국민의 참여와 숙의의 과정이 함께해야 한다. 최근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을 놓고 계속 진행을 할 것인지 아니면 중단을 할 것인지를 두고 공론화위원회가 꾸려지고 시민참여단의 토론과정이 있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권고안이 발표됐다.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탈도 많았지만 이런 숙의 과정이 민주주의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닌 모든 국민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숙의민주주의라는 잘 익은 밥도 천천히 소화하지 못한다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 flickr

지금까지의 민주주의가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인스턴트식 밥이었다면 숙의민주주의는 가마솥에서 잘 익은 밥과 같다. 숙의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신고리원전 5·6호기의 공론화 과정만 보더라도 어떤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적절한지, 객관적인 정보를 어떻게 시민들에게 제공할지, 시민참여단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지 등 보완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러나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잘 익은 밥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기 마련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숙의민주주의가 이루어지던 3개월간의 여정이 첫 투표를 하던 순간만큼 설레고 기억에 남는다.


편집 :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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