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운전대

▲ 송승현 기자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조나단 폴락 연구원은 『No Exit』이라는 저술에서 김일성이 6·25 이후 미국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다고 적는다. 북한이 핵에 집착하는 이유가 “미국에 대한 공포”라는 의미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 직후 미국과 제네바 협약을 맺는 등 생존을 위한 다른 출구도 찾았다. 그러나 2002년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미국의 입장이 언제든 바뀔 수 있음을 깨닫는다. 북한은 핵에 더욱 집착하게 됐고, ‘공포심’에 기반한 모험주의는 오늘날도 유효하다. “북한과의 전쟁 계획을 가져와” 2001년 부시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럼스펠드의 지시만이 아니다. 1994년 클린턴 대통령의 대북 공격 계획 등 미국은 공화 민주 어느 진영을 막론하고 북한과의 전쟁계획을 수립하며 실행 여부를 저울질한다. 북한의 핵 실험 목적이 지구촌 군사 최강국 미국의 ‘전쟁공포’에서 벗어난 자신들의 안위’라면, 그 목적에 부합하는 대상은 한국이 아닌 미국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북한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미국의 북한 공격 프로젝트만이 아니다. 매년 북한 턱밑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한미 합동 군사훈련.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원치 않는다”는 미국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안보 딜레마’에 따르면 아무리 방어 차원의 훈련이라도 북한은 공포심을 느낄 수밖에 없고, 대응책으로 군사력 증강 즉 ‘핵’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지난 5월 8일 북한과 미국의 노르웨이 1.5트랙 회담에서 북한은 대화 의지를 밝혔으나 미국은 여전히 모르쇠다. 미국에 평화 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북한의 소리를 음흉한 속내로 바라보기보다 귀 기울이고 우리의 협상 카드로 쓰는 자세가 지혜롭다. 이 지점에서 중국이 제시하는 ‘쌍중단(북한 핵실험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 동시 중단)’ 조언의 효용성이 커진다.

국제정세를 보더라도 북한의 군사모험주의와 동북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제재가 아니다. 지금까지 북한의 모험에 대한 제재는 더 큰 모험주의로 연결됐을 뿐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군비 경쟁의 도미노 현상으로 이어진다. 이미 6차 핵실험을 빌미로 사드 임시배치가 완료됐고, 미국 무기 추가구입이 논의된다. 중국과 러시아는 강력한 대응조치를 공언한 상태다. 군비 강화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이를 가장 즐길 측은 일본이다. 과거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 정권은 현 평화헌법을 뜯어고쳐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안달이 난 점은 전 세계 주지의 사실이다. 냉전 시대 소련의 몰락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가운데 미국과의 군비 경쟁 결과다. 소련의 몰락은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과 G2를 놓고 경쟁 중인 중국에게 반면교사다. 중국이 숱한 도발에도 미국과 한국에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이유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적 옵션은 국제 사회에서도 용인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지난 8월 메르켈은 “미국의 군사적 옵션을 지지할 용의가 없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9월 4일 스위스 로이타르트 대통령은 북핵 갈등 해결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 ‘운전대론’의 진정한 출발은 한국 주도하에 1953년 휴전협정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혀 ‘평화협정’의 논의를 시작하도록 멍석을 펴는 일이다. ⓒ MBC 뉴스 갈무리

수십만 거란 대군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서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쟁의 위기를 막아냈다. 서희 외교의 성공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은 데 있다. 고려가 송나라와 대결하는 거란의 배후위협요인이 아니며, 오히려 거란과 공동으로 여진을 견제해 거란의 뒷마당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문 대통령은 ‘운전대론’을 내세우며, 한반도의 위기를 자주적으로 풀어나가겠다는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뒷좌석에 앉아 방관만 하지 않고, 운전대라도 잡았다”는 생색내기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운전대론’의 진정한 출발은 한국 주도하에 1953년 휴전협정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혀 ‘평화협정’의 논의를 시작하도록 멍석을 펴는 일이다. 서희가 거란의 불안요인을 없애 침략야욕을 접게 만들었듯이, 북한의 불안과 미국의 의구심을 동시에 없애는 운전능력을 보고 싶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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