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 풍속문화사] ⑦ ‘동에서 서로’… 인류 발전 원동력 된 제지술
[문화일보 공동연재]

2017년 7월 한여름. 톈산(天山)산맥 정상은 밤에 기온이 8도로 떨어져 겨울 추위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차를 타고 톈산산맥을 넘어 7시간 반을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곳. 끝없는 초원을 지나 카자흐스탄 국경 포크로브카(Pokrovka) 마을이 드넓게 펼쳐진다. 확 트인 평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물줄기 이름은 탈라스(Talas)강. 중국 사서에 나오는 달라사(달羅斯). 역사 시간에 배운 탈라스강 전투(Battle of Talas)의 탈라스강이다. 톈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으면서 키르기스스탄에서 발원해 카자흐스탄으로 흘러든다. 백로(白露)를 이틀 앞두고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책과 동서 문명 발전의 주역, 종이의 탄생과 전파 과정을 들여다본다. 종이 문화사 한가운데 놀랍게도 우리 선열 한 분이 그 이름을 아로새긴다.

▲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군이 이슬람 세력과 맞섰던 탈라스강 전투 현장으로 알려진 키르기스스탄 포크로브카 마을 평원. Ⓒ 김문환

탈라스강 전투, 고선지의 당나라군과 이슬람군 대충돌 

751년 7월 한여름. 탈라스강에서 당나라의 대군(1만 명에서 10만 명까지 다양한 설)이 역시 비슷한 숫자의 이슬람 군(최대 20만 설까지 다양)과 맞붙었다. 당나라 총사령관은 실크로드 도시 쿠차에 거점을 둔 당나라 안서도호부의 책임자인 안서절도사 고선지 장군, 이슬람 측은 압바스 왕조(750~1258)의 호라산(Khorasan) 총독 지야드 이븐 살리흐. 호라산은 아무다리야강(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이남 지역을 가리킨다.

▲ 인류 역사 최초의 제지공장을 차린 사마르칸트가 제지술을 바탕으로 문화를 발전시켜 15세기 초 지구촌 최대·최고 수준으로 세운 울루그베크 천문대. ⓒ 김문환

오늘날로 치면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이란 동부와 파키스탄 북부다. 당나라의 동맹군은 튀르크 민족 용병 세력인 카를루크(Karluk)족, 이슬람의 동맹군은 소그드인(사마르칸트 중심)과 당나라의 숙적 티베트다.

전쟁의 단초는 이렇다. 8세기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열었던 BC 2세기 말 한나라 무제 때보다 범위를 넓혀 중앙아시아 곳곳에 군대를 보냈다. 당나라의 세력 확대와 강압적인 지배에 불만을 품은 소그드가 호라산 총독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동서 양대 제국의 전쟁으로 번진다. 팽팽하던 전세는 카를루크족이 당나라에 등을 돌리면서 이슬람의 압승으로 마무리된다. 승리만 일구던 고선지 장군은 간신히 쿠차로 탈출해 전열을 정비하며 재기를 노린다. 하지만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안녹산은 한족이 아닌 소그드인)’이 일어나 수도 장안이 위협받자, 양귀비와 희희낙락하던 당 현종은 전군을 중앙아시아에서 불러들인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문명권으로 재편돼 오늘에 이른다.

▲ 중국 둔황에서 출토된 BC 2세기 무렵 한나라 때의 종이. 란저우 간쑤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김문환

당나라 패배 뒤, 역사의 용광로 사마르칸트에 인류사 첫 제지공장 

문명사적 의미를 갖는 전투 현장을 러시아의 동양학자 바르톨트는 1905년 카자흐스탄 잠불(Zhambul)로 지목했다. 하지만 북한 출신의 전향한 역사학자로 실크로드 문명사의 대가 정수일은 면밀한 고증을 거쳐 위치를 바로잡는다. 잠불에서 남쪽으로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어 8㎞ 정도 떨어진 포크로브카 마을 평원이다. 동서 문명의 흐름을 바꾼 대전투 현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적한 평원 한복판에 서면 기마민족인 고구려 왕족의 후손 고선지 장군의 족적이 되살아난다. 소그드는 물론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파키스탄까지 원정하며 뛰어난 전략으로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선지 장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훗날 ‘안사의 난’ 과정에서 억울하게 참수된 비극적 종말의 아쉬움 뒤로 인류 문화사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 그의 족적이 겹쳐진다. 제지술(製紙術) 전파.

탈라스강 전투의 빌미를 제공한 소그드의 중심지 사마르칸트로 가보자. 유럽과 아시아를 오간 이란계 기마민족 스키타이(Scythai)의 일파가 현지화한 사카(Saka)족이 소그드라는 이름의 국가를 세웠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 아래 있다가 BC 328년 알렉산더의 침입을 받는다. 최강의 마케도니아 기병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에 끝까지 저항할 만큼 강력한 세를 과시하던 소그드. 알렉산더는 유화정책을 썼고, 결국 소그드 공주 록사나와 결혼하면서 이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심는다.

한 무제 이후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번영하면서 7세기에는 튀르크족의 중심 무대가 됐고, 650년쯤 고구려 연개소문의 사절단이 튀르크와 대당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찾은 곳이기도 하다. 탈라스강 전투의 당나라 포로들이 끌려오던 당시 사마르칸트는 목욕탕이 100개나 있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사마르칸트인들은 중국 종이의 우수성과 희소가치를 간파했고, 포로 가운데 제지기술자들을 활용해 757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제지공장을 세웠다. 중국 수입에서 벗어난 ‘사마르칸트지(紙)’는 각지로 수출돼 호평을 받았다.

▲ BC 2~BC 1세기 한나라 때의 먹. 란저우 간쑤성 박물관. ⓒ 김문환

바그다드 제지공장… 중세 이슬람 학문 발전, 인류 문화에 큰 기여 

탈라스강 전투 이후 이슬람화된 사마르칸트의 제지술은 압바스 왕조의 수도이던 바그다드로 옮아갔다. 압바스 왕조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는 795년 바그다드에 제지공장을 세운다. 그리스 로마의 학문을 버린 게르만족의 중세 서유럽 기독교 사회와 달리 이슬람은 비잔틴제국 영토를 점령하면서 접한 그리스 로마의 학문적 성과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인류 문명의 격을 높인다. 압바스 왕조 2대 칼리프 만수르를 비롯해 바그다드에 제지공장을 세운 하룬 알 라시드가 그랬다.

특히 압바스 왕조 7대 칼리프 알 마문은 ‘지혜의 집’이라 불리는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 Hikmah)’를 세워 그리스 고전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두꺼운 양피지에서 벗어나 가볍고 다루기 쉬운 종이가 큰 역할을 했음은 불문가지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히포크라테스는 물론 인도의 수학과 과학도 종이를 매개로 여기서 아랍어로 다시 태어났다. 알칼리(Alkali), 알코올(Alcohol), 알지브러(Algebra·代數), 알케미(Alchemy·연금술)…. 모두 중세 이슬람에서 기원한 과학 용어들이다. 중국 국경에서 터키까지 지배했던 티무르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15세기 초 티무르의 조카 울루그베크가 건설한 당대 지구상 최대·최고 수준의 울루그베크 천문대 역시 이슬람 문명과 종이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서구 사회가 르네상스 이후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을 되살릴 수 있었던 계기는 아랍어로 보존된 그리스 학문을 라틴어로 옮기면서부터다. 종이와 이슬람 문명이 인류사에 남긴 선물이다.

▲ 제지술을 받아들인 서양 사회는 종이를 바탕으로 15세기 금속인쇄술을 발전시켜 정보혁명을 통해 지구촌 문명을 주도해 나간다. 당시 만들어진 책이 독일 마인츠 구텐베르크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김문환

북아프리카, 스페인 거쳐 이탈리아 르네상스, 독일 금속인쇄혁명 연결

제지술은 바그다드에서 서아시아 이슬람의 또 다른 중심지 다마스쿠스(오늘날 시리아 수도)를 거쳐 900년쯤 이집트 카이로에 제지공장 설립으로 이어진다. 파티마 왕조 시절 카이로판 지혜의 집 ‘다르 알 히크마(Dar al Hikmah)’의 학문 융성을 낳았던 이집트 제지술은 당시 이슬람권으로 통일된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 튀니지의 카이르완과 모로코의 페스를 거쳐 마침내 1150년 지브롤터 해협 건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간다.

당시 스페인 국토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의 그라나다에서 지중해안을 타고 바르셀로나 방면으로 중간 지점인 안달루시아 하티바(Xativa)에 제지공장이 세워지면서 이슬람교도의 제지술은 마침내 기독교 사회인 서유럽 이탈리아로 넘어간다.

이탈리아 시칠리아는 일찍부터 이슬람 세력이 지배해 종이가 사용됐지만, 당시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과 대결하던 이탈리아의 비이슬람교도 지역은 종이를 이슬람과 동일시해 사용금지령을 내리는 웃지 못할 조치도 취했다. 그러나 양피지는 물론 부서지기 쉬운 파피루스에 비할 수 없는 장점을 지닌 종이의 수요를 막을 수는 없었다.

1276년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몬테파노에 이어 1295년 볼로냐에 제지공장이 생겨난다. 이후 이탈리아 제지술은 피렌체에서 단테(1265~1321)를 비롯한 페트라르카(1304~1374), 보카치오(1313~1375) 3인방의 문예 르네상스(Renaissance) 밑거름이 된다.

이후 제지술은 북쪽으로 올라간다. 이탈리아에서 종이를 수입해 쓰던 독일이 1320년쯤 마인츠와 쾰른, 1336년 뉘른베르크에 제지공장을 세운다. 이렇게 넉넉해진 종이를 기반으로 100여 년 뒤인 1450년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가 금속인쇄술이라는 정보혁명의 뇌관을 터트린다. 제지술은 1348년 프랑스 트루아 지방에 첫 제지공장 설립으로 연결된다(프랑스에서는 1189년 제지공장이 처음 문을 열었다는 설도 있음). 이어 바다 건너 영국으로 넘어가 1498년 하트퍼드셔에 제지공장이 설립되는 결실을 본다. 16세기 셰익스피어(1564~1616)의 위대한 작품들은 이렇게 등장한 종이라는 기반 위에 움을 틔웠다.

중국 제지술은 한나라 시대(BC 2세기 말~BC 1 세기 초) 완성

이렇게 인류 문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종이는 중국에서 언제 발명됐을까. 얇게 썬 나무나 대나무 개비, 즉 목간(木簡), 죽간(竹簡)에서 벗어난 종이가 처음 선보인 것은 현재 남은 공식 기록으로는 2세기 초다.

‘후한서(後漢書)’에 채륜(蔡倫)이 창포, 마, 나무껍질을 재료로 종이를 만들어 황제인 화제(和帝)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105년이다. 정말 그럴까?

장소를 실크로드의 출발 지점이자 중국 문명의 젖줄 황허(黃河)의 상류 중심도시인 중국 간쑤(甘肅)성의 성도 란저우(蘭州)로 옮겨 보자. 란저우 시내 간쑤성 박물관에는 서한(西漢·BC 206~AD 8) 시대 종이와 먹이 전시돼 있다.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이 종이 말고도 몇 군데 발굴을 통해 BC 2세기 말에서 늦어도 BC 1세기 초 종이가 발명됐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우리 민족 문화 속으로 제지술이 전파된 것은 언제일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일본서기(日本書記)’나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백제 아신왕 시기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 왕인(王仁)이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달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이미 백제에 제지술이 소개됐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서기’에는 625년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 법륭사(法隆寺) 금당에 벽화를 그린 것은 물론 종이를 만든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고구려에 제지술이 보급돼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 종이는 고려 이후 중국에 공물 품목에 들어갈 만큼 우수했고 이런 제지 문화를 바탕으로 고려 후기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直旨) 인쇄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이라는 과학적인 성과를 낸다. 다산 정약용이 18년 유배라는 시련 속에서도 500권의 한문책을 써 신채호로부터 “한자 문화권 내 최고의 학자”라는 찬사를 받은 것도 우수한 제지문화가 뒷받침된 덕분이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 종이와 책에 얽힌 문화사를 돌아보며 책갈피에 손을 얹어 본다.


문화일보에 3주 단위로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는 '동서문명사'와 'TV저널리즘'을 강의합니다. (편집자주)

편집 : 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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