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틈'

▲ 나혜인 기자

경제학 교과서에는 ‘ceteris paribus’라는 개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 이는 이론과 현실의 틈을 메우기 위한 변인 통제 장치다. 사회과학 이론은 현실을 반영해야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변수들을 있는 그대로 봐서는 간명한 이론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때로 분명하게 예측할 수 없는 현실들을 미리 배제한다. 이를테면 경제를 전망하는 데 국가안보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는 식이다.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을 만들려고 역설적으로 어떤 현실에는 눈을 감는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 사이 틈은 학자들이 편의를 위해 만든 도구에 가려진 것일 뿐, 없어진 게 아니다. 세상에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다 해결해줄 거라 믿었던 시장이 실패하고, 구원투수로 등장한 정부가 실패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또 학자들은 현실을 교훈 삼아 새로운 이론을 만든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불러온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에는 ‘블랙 스완’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을 돌연변이인 검은 백조에 비유했다. 이처럼 현실이 도망가고 이론이 쫓아가는 추격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론과 현실의 간극은 결코 완벽히 메울 수 없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편협해진다. 최저임금을 논할 때 노동시장의 수요-공급곡선만 그리다가는 사회 빈곤층의 생존 문제를 놓치게 된다.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지을지 말지를 두고 원자력기술자들의 전문성에만 기대다가는 현재진행형인 방사능 오염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정해진 하나의 답만을 강요하는 사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국가의 성장모델을 불변의 진리인양 모방해온 우리 사회는 그간 현실 세계에서도 수많은 ‘ceteris paribus’를 먼저 가정해 놓고 모른 체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기보다 특정 이론과 이념을 갖다 놓고 이에 맞춰 현실을 왜곡해왔다. 갈등을 좀체 허용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갈등지수가 높은 우스운 현상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 중 마음에 드는 것만을 취사선택해 그것을 답이라고 우겨온 위정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원전 주변지역 주민들의 갑상선암 발병률은 국내 평균치보다 수십 배 높다. 원자력공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다. ⓒ JTBC 뉴스 갈무리

현실이 이론처럼 간명하다는 믿음은 일시적으로 마음을 편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결코 공동체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지 못한다. 현실의 세계에서 ‘ceteris paribus’라는 가정은 통하지 않고, 단순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설명하기에 현실은 너무도 복잡다단하다는 점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눈과 귀를 가린 채 스스로를 맹신하는 시장경제에는 이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원자력공학을 모른다고 다른 이해당사자들을 ‘비전문가’로 규정해 편가르고 비난하는 일도 멈춰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세계를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현실은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론과 현실 사이의 틈은, ‘없다고 믿는 것’만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10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1학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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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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