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씨드림 변현단 대표를 만나다

옛말에 ‘농민은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했다. 농민에게 씨앗은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1년 농사가 끝나면 농민은 이듬해 파종할 종자부터 챙겼다. 씨앗은 수천 년 전부터 농민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왔다. 그런데 토종 씨앗이 설 자리를 잃고 점점 사라져 간다. 종자는 농사의 시작이다. 소수 다국적기업에 빼앗긴 종자 주권을 되찾아 농부에게 종자권을 돌려주려 애쓰는 단체가 있다. 토종 종자와 전통농업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 씨드림이다.

씨드림은 ‘Seed’와 ‘Dream’의 합성어로 ‘씨를 드린다’는 의미도 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토종 씨앗 수집 활동을 이어받아 전국을 다니며 종자 보존을 위해 노력해왔다. 2009년 9명으로 시작한 씨드림은 지금 1만3천여 회원이 가입해있다. 씨드림 변현단 대표를 만나 씨앗 나눔 활동의 의미를 알아보았다.

토종 씨앗은 자연과 함께 가야

전라남도 곡성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30분을 달려 도착한 석곡버스터미널, 그곳에서 변 대표를 만났다. 그녀가 거주하는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방송길까지는 다시 차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변 대표는 “6개월 간 친구들과 손수 집을 지었다”고 말했다. “필요한 나무는 주변에서 얻어오고, 진흙은 몇 번이고 다시 발라 벽면에 금이 가지 않게 했다”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착한 곳에는 자연에 둘러싸인 아담한 집과 2천여 평 밭이 펼쳐져 있었다.

▲ 변 대표가 6개월에 걸쳐 손수 지은 집. 원래는 과수원과 논이었던 땅을 개척했다. ⓒ 유선희

변 대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씨앗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밭에 심은 작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토종 종자의 가치를 알려면 먼저 농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 대표는 전통 농업 방식을 추구한다. 화학 비료를 쓰지 않고, 제초제도 사용하지 않는다. 예초기 말고는 사용하는 농기계도 없다. 그 때문인지 호밀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는 사람 키만큼 자란 잡초와 토종 호밀이 함께 자란다. 한 가지 작물이 가지런히 심겨 있는 보통 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는 “풀이 함께 있으면 작물이 가뭄을 덜 타고 토양 유실도 적다”고 귀띔했다. 올해는 유독 가뭄이 심했다. 그녀는 “잡초와 지푸라기를 토양 표면에 덮어 주는 자연 멀칭(mulching)이 아니었다면 작물 피해가 심했을 것“이라 말했다.

▲ 멀칭(mulching)은 작물이 자라는 표면을 덮어주는 일이다. 최근에는 흔히 비닐로 멀칭을 하는 바람에 빗물이 스며들지 못해 지하수가 고갈되고 있다. ⓒ 유선희

변 대표는 “토종 씨앗은 무엇보다 자연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농사는 공기부터 바람, 물, 땅속의 미생물까지 모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순환 원리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전통 방식인 ‘자연농’으로 기른 수확물은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 크기가 작고, 수확량도 많지 않다. 관행농을 하는 농민들이 경제성이 떨어지는 자연농을 비판하지만 변 대표는 “알맹이만 크면 뭐하나요, 씨앗이 제대로 자라야죠”라고 반박한다.

“농부들은 알맹이가 크고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씨앗만 심으려고 해요. 그런 작물은 대개 건강에 도움 되지 않는 식재료예요. 자연 순환을 생각하지 않고 단작을 하죠. 토양은 유실되고 지하수도 고갈되고 생태환경은 망가집니다.”

‘본전’ 생각나지 않는 농사라야 지속가능

자연농과 개량종자는 궁합이 맞지 않다. 식물의 기본형질을 조작한 씨앗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과 상반된다. 토종이 아닌 씨앗은 채종을 해도 이듬해 다시 싹을 틔우기 힘들다. 매년 종묘회사에서 씨앗을 새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씨앗이 변화하는 기후와 토양에 적응할 새를 주지 않는 것이다.

▲ 씨앗을 많이 뿌렸지만 무거워서 듬성듬성 난 남도 참밀. 변 대표가 직접 만든 ‘똥 퇴비’를 뿌려 알이 더욱 굵다. ⓒ 유선희

개량종자는 ‘생산성 증진’이란 명목 아래 그에 맞는 농약과 비료를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농민의 ‘본전’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반면 토종씨앗으로 농사를 지으면 씨앗과 퇴비, 제초제 등을 구입할 필요가 없다. ‘돈’이 되는 작물을 재배하는 게 아니라 농민에게 필요한 작물을 선택해 자유롭게 농사를 짓는 게 ‘자연농’이기 때문이다. 변 대표의 밭에는 중풍 예방에 좋은 독활, 여성 냉증에 효과적인 옻나무 등 약초들이 많다. 그녀가 어머니를 위해 심은 작물이다.

“작물을 선택한 이유는 돈이 아니라, ‘나와 우리 가족의 필요에 의해서’예요. 필요한 작물을 필요한 만큼 키우고 남는 것은 팔면 돼요. 농사는 노동력을 최소화하는 거예요. 농사를 어렵게 지으면 본전 생각이 나요. 지금은 너무 인위적이죠.”

변 대표는 토종 작물만 재배하지는 않는다. 토종의 가치에 주목하면서도 ‘종교화’는 경계한다. 집 앞 비닐하우스 안에는 조카들을 위해 심은 수박과 참외 등 과일이 자란다. 향신료 쪽에 관심이 많아 캐모마일, 바질, 애플민트 등의 허브는 텃밭에서 기른다. 집을 중심으로 앞뒤로 펼쳐진 밭에는 1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란다. 그는 “손길이 많이 가는 작물은 가까이 두고, 상대적으로 생명력이 강하고 매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과수는 멀리 기른다”고 말했다.

토착화한 씨앗이 토종이다

토종 종자는 이 땅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살아남았다. 채종이 가능해 할머니한테서 딸로, 그 손자한테 또 씨앗이 전해진다. 생태 순환 체계를 철저히 따르는 모습이다. 요즘 같이 가뭄이 심해진 날씨에는 뿌리가 물을 찾으려 깊이 내려간다. 가뭄에서 살아남은 작물은 다음 해에 더욱 잘 산다. 지난 13일에는 대구 가정집에 심어둔 바나나가 열매를 맺었다는 기사가 세간의 화제가 됐다. ‘토종종자만이 아열대로 변해가는 우리나라 기후 특성에 적응해 살아남을 것’이라는 게 변 대표의 주장이다. 기후에 적응한 굳센 종이 남아 대를 이어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가지는 원래 길어요. 동남아 가지는 둥글고요. 그런데 최근에 파주 쪽에서 가지가 둥글게 났어요. 종자가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거죠.”

▲ 왼쪽은 흑수박, 오른쪽은 무등산 수박이다. 모두 토종이다. 겉모양은 같지만 종자가 다르다. ⓒ 김미나

땅에 토착화한 종은 벌레가 생기거나 병에 걸리는 일이 없다. 본래 토종배추라고 알려진 구억배추는 사실 1950년대 개량된 배추다. 50년 이상 채종됐지만 벌레가 많이 생기는 특징이 있다. 우리 토양에 맞는 배추는 9월 말에 파종하는 조선배추다. 장마 이후 심기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2월에 씨를 뿌려 여름에 수확하는 개량 고추는 장마 전에 열매를 맺어 탄저병에 취약하다. 토종 고추는 3월 말~4월 초에 파종하는데 처음부터 늦게 심어 병충해 걱정이 없다. 변 대표는 “현재 농산물의 파종 시기가 너무 이르다”고 걱정했다. 자연의 시간이 아닌 소비자의 필요에 따라 정해진 작부체계 때문에 농민들은 더욱 힘들게 농사를 짓는다.

씨앗은 농부의 손에서 흩어져야 한다

"씨앗의 다양성이 보전되려면 집중이 아니라 분산되어야 해요. 흩어져야 살아남죠. 이 지역 씨앗이 병해충에 걸려 사라져도 다른 지역에서 다시 가져오면 돼요. 자꾸 뭔가 집중하려는 체제로 가면 금방 한계에 부딪혀요.“

▲ 전국을 다니며 씨앗을 수집하지만 소유하는 게 아니다. 농부의 씨앗을 빌려와 증식하고 나눌 뿐이다. ⓒ 유선희

최근 씨앗도서관이 대구, 춘천, 홍성 등에 잇달아 개설되고 있다. 토종의 중요성이 지역 농민뿐 아니라 도시농부와 소비자에게도 전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변 대표는 씨앗이 한 곳으로 모이는 현상을 걱정하며 “씨앗은 농부의 손에서 다시 땅으로 심겨야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앙 집중 방식은 전통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그는 “농촌이 되살아나려면 마을 단위 공동체로 분산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종자를 수집하고 있지만, 씨앗 소유주가 씨드림이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농부의 씨앗을 잠시 빌려와 증식해서 나눌 뿐입니다.”

올해 씨드림은 대산농촌재단에서 지원하는 농업 실용연구과제로 선정됐다. 변 대표는 ‘지역·개별 농가 씨앗 은행 지도 만들기’에 나섰다. 내년 3월 출판을 목표로 마을공동체와 농부주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역별로 농가의 토종 씨앗 보유 현황을 조사 중”이라며 “전국 농가 씨앗 은행 지도를 만들어 살아있는 씨앗 은행 역할을 다할 것”이라 기대했다.

“농가 씨앗 은행 지도는 단순히 지역별 농가를 기록하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농가별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거예요. 씨앗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책을 보고 농가에 직접 연락하면 돼요. 직접 가서 씨앗이 재배되는 현장도 보고 서로 정보도 나누고 한마디로 ‘교류의 장’이 되는 거죠.”

농부가 전문가다

▲ 변 대표는 종자를 수집하는 방법도 소개했다. 먼저 트랙터 같은 농기계가 별로 없고, 소규모 농사를 짓는 집을 방문해 씨앗을 나눠달라고 한다. ⓒ 유선희

“지금 농부한테 씨앗을 채종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농가 씨앗 은행은 농부들에게 소유권을 주는 거예요. 기업이 대대로 이어져온 농부의 권리를 침탈하지 못하게 막는 행위라고 보면 돼요.”

변 대표는 “농부가 종묘회사에서 육종된 씨앗을 구매하고 지역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사방법을 배우는 것이 한국 농업의 실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씨앗을 채종하고 더 나은 씨앗을 얻기 위해 육종하는 몫은 농부의 역할”이며 “전문가는 바로 농부여야 한다”고 꼬집었다.

“농부보다 농사 잘 짓는 사람은 없어요. 농부들은 매일 들여다보고 관찰해요. 평생을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인데. 오히려 전문가들이 농사를 바라보는 시야가 좁을 때가 더 많아요.”

농업에 관한 연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서 농부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대부분 작물에는 세 가지 이상 맛이 있어요. 고추도 매운맛, 단맛, 신맛이 있어요. 그런데 전문가들은 매운맛만 강조해서 육종해요. 고추는 매운맛 뒤에 신맛이 있다는 걸 대부분 모를 거예요.”

변 대표는 “고추 맛이 획일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양성이 사라진 맛은 특정 이익집단의 주머니를 채우는 행위”라고 말했다. 토종 씨앗의 방향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농부들이 진정한 삶의 권리를 찾는 일이고 소비자에게는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일이다. 토종의 가치는 다양성을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

토종 씨앗은 인증제 아닌 법제화가 중요

▲ ‘토종씨앗 운동의 현황 및 과제공유를 위한 공개간담회’ 알림. 토종씨앗에 관한 논의가 공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처음이다. ⓒ 다음 카페 ‘씨드림’

“농산물 인증제가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어요. 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고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증제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변 대표는 농산물 인증제에 반대한다. 친환경 농산물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높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농부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다. 최근 토종 농산물이 회자되며 ‘믿을 수 있는 먹거리’임을 증명하는 인증제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에 변 대표는 “인증제 대신 이력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제부터 재배해왔는지를 기록하자는 것이다.

토종 씨앗의 정확한 학문 명은 1세대 이상이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는 씨앗은 1세대 이상보다 30년 정도 된 것들이 많다. 변 대표는 “여기에 토종이라 명명한 것은 현 사회 풍조가 토종 씨앗을 너무 외면하고 있어 이에 강조점을 두고 보급·확산하고 있는 것”이라 답했다. 인증제의 상업적인 성격은 토종 씨앗과 맞지 않다는 게 그녀의 뜻이다.

“지금 토종 씨앗에 관한 기조정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분명히 친환경 인증제처럼 자본논리에 빠지게 될 거예요. 신자유주의는 농부를 더욱 더 가난하게 만들어요.”

오는 22일 토종 씨앗의 국가 정책 입안을 위해 방송통신대학에서 간담회가 열린다. 전국 토종 씨앗 활동가와 단체장들이 모여 토론하고, 농민의 종자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정책을 논의하는 장이다. 지자체와 정부의 역할, 실질적으로 씨앗 보급 운동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변 대표는 ‘농산물 인증제에 대한 문제점을 정확히 설파하고, 유전자원인 씨앗을 보호하기 위한 제반 활동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자연농을 하면 당장 눈에 띄게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그러나 5~10년 뒤에는 결과가 다르다는 거죠. 우리는 농사를 편히 지을 수 있고, 환경도 살릴 수 있어요.”

변 대표는 농사를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렀다. 망가지는 생태환경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토종 씨앗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씨앗을 매개로 삶의 양식을 바꾸는 거예요. 토종 씨앗은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대산농촌재단과 함께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이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 :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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