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개헌

▲ 박상연 기자

평범한 사부대중의 모습에 가깝다. 부처를 상징하는 광배도 없으니 말이다. 신라인들이 경주 남산 삼릉계곡 중턱에 바위를 쪼아 새긴 관음보살상 얘기다. 이 불상은 자연과 하나 된 마음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불상 뒤로 솟은 바위가 자연이 빚은 광배가 되기 때문이다. 노천불이라 햇빛이 비치는 각도와 조도에 따라 불상의 인상도 달라진다. 이는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도 마찬가지다. 신라와 백제인들은 이렇게 자연 속에 부처가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바위를 조각하며 숨어있는 부처를 ‘꺼낸’ 것이다.

시민들이 일상에서 헌법을 꺼내 읊는다. 지도자가 권력을 사유화하며 헌법정신을 짓밟은 암흑의 시간을 마주하면서다. 개헌 방향도 다양하다. 권력 구조 개편에서부터 선거제도 개선, 기본권 확장 등을 담는다. 지금 헌법은 1987년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 아래 시민항쟁이 낳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하는 87년 체제는 3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근간이었다. 시민이 선택한 대통령을 탄핵하는 과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껏 시민은 객체였다. 87년 개헌도 여야 의원 ‘8인 회의’가 4개월 만에 뚝딱 해치운 결과물이다. 때로 헌법은 권력 투쟁의 도구였다. 개헌보다는 ‘개헌론’처럼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일이 잦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발각 하루 전 개헌론을 끄집어냈다. 미국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는 민주주의에서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일러준다. ‘제도’로 ‘마음’을 숨기려 했던 박 전 대통령의 속셈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정치권이 쏟아내는 ‘개헌론’은 혹시 인간의 ‘마음’보다 ‘제도’에 치중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 헌법은 시민의 삶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돈다. 소득 양극화, 지역 불균형, 기본권 침해 등 헌법이 외면하는 삶들이 넘쳐난다.

2012년 아일랜드는 헌법 8개 조항을 검토하기 위해 100인의 ‘헌법회의’를 만들었다. 구성원은 전국에서 추첨 선발된 시민 66명과 의원 33명, 의장 1명이었다. 시민 추첨은 성, 연령, 나이 등을 고려해 뽑았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에서 공직자 추첨제도를 닮았다. ‘헌법회의’는 5분의 4를 넘는 합의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시민 의원이 특정 의견에 기울지 않고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기꺼이 바꾸기 때문이다. ‘50대 전문직 남성’에 저당 잡힌 우리나라 국회의 경직된 의사결정 과정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 경주 남산 삼릉계곡 중턱에 있는 마애관음보살상. 자연 속에 어우러져 있는 불상의 모습이 신비롭다. 신라인들은 바위 속에서 부처를 '찾아 꺼내기' 위해 불상을 조각했다. Ⓒ 박상연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속에서 천사를 발견하고 그를 자유롭게 한 것”이라며 ‘다비드’를 빚어 르네상스 조각의 새 시대를 열었다. 고대 신라와 백제인들도 바위 속에서 부처를 발견하고 그를 민중의 마음속으로 해방시켰다. 헌법은 시민의 삶 안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그때야 시민을 자유롭게 하고, 누구나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뒷배를 봐 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5당 원내대표 청와대 회동에서 재확인한 내년 2018 지방선거 시 헌법 개정 국민투표라는 일정표를 받아든 지금. 시민이 주체적으로 토론하고, 다양한 시선에서 촘촘하게 헌법을 다듬는 길이 열려야 하는 이유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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