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기획] 재외국민, 한 표 행사로 ‘정치의 의미’ 되새기다

▲ <단비뉴스>가 만난 재외국민 투표자들. 각 사진을 클릭하면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지난 25일부터 30일까지 제19대 대선 재외선거가 있었다. 116개국에 204개 재외투표소가 마련됐다. 투표 시간은 현지시각을 기준으로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까지였다. 이번 재외선거는 역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 재외유권자로 등록한 294,633명 중 총 221,981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투표율만 75.3%로, 지난 18대 대선 재외선거 투표율보다 4.2%p 높다.

재외선거는 국민이 어디에 있든 기본권 중 하나인 참정권을 보장하는 일이다. 재외선거는 투표소가 마련된 대사관의 위치에 따라 유권자들의 투표 환경이 ‘모험’이 되기도 한다. 투표를 위해 80만 원짜리 비행기 티켓을 끊고, 어린 아기를 데리고 이틀 기차 여행을 하고, 17시간 운전을 견딘 이들을 <단비뉴스>가 만났다. 오는 9일 대선에 앞서 자신의 한 표 행사를 위해 시간과 비용을 마다한 재외국민 투표자들의 목소리는 이번 대선 투표의 가치와 선거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운다. 투표에 각자의 염원이 담긴 이들의 사연을 현지 육성으로 듣는다.

볼리비아 한영준, “국민이 만드는 더 좋은 나라” 

▲ 재외국민 투표를 하기 위해 1,000km를 날아 과테말라 한국 대사관을 찾은 김경미, 한영준 부부. 한 씨는 능력 있는 대한민국과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소망을 내비쳤다. Ⓒ 한영준

‘국제 꽃거지’라는 별명을 가진 한영준(33) 씨는 8년째 세계여행 중이다.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이른바 ‘공정여행가’다. 한 씨는 100원씩 후원받아 볼리비아에 ‘희망꽃 학교’를 짓기도 했다. 그와 배우자 김경미(32) 씨는 지난달 28일 투표를 하기 위해 과테말라 수도인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했다. 멕시코를 여행 중이던 부부는 투표 일정에 늦지 않기 위해 별도로 80만 원을 주고 비행기를 타야 했다. 

한 씨는 “무능력한 나라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직접 ‘투표권’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DMZ 지뢰 폭발 사고, 백남기 농민의 희생을 조목조목 짚으며 국가의 무능력을 질타했다. 그는 “좋은 나라를 만드는 힘은 한 명의 정치인이 아니라, 권리를 행사하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투표의 중요성을 짚었다. 

핀란드 최원석, “내가 갑이 되고 대통령이 을이 되는 계약”

▲ 핀란드에 거주하는 최원석 씨는 아내 김아연 씨와 아이를 데리고 18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한국 대사관이 있는 헬싱키를 찾았다. 최 씨는 나중에 아이와 함께 투표한 경험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 최원석

핀란드 북부 로바니에미에 거주하고 있는 최원석(33) 씨는 가족과 함께 지난달 28일과 29일, 이틀에 걸쳐 투표를 하고 왔다. 한국대사관이 있는 헬싱키까지 왕복 18시간이 소요되고, 70만 원이라는 비용이 들었다. 최 씨는 외국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생활비에 나가는 비용을 모아 투표에 쓰기로 마음먹었다. 

최 씨는 투표를 ‘고용계약’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갑이 되고 정치인 혹은 대통령이 을이 되는 계약”이라며 “계약이 맺어져야 질책도 하고 비판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대통령이 잘못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며 “이 소중한 경험을 아이에게도 들려주고 싶다”고 투표한 소감을 술회했다.

미국 서현승, “분노로만 끝날까 걱정돼서”

▲ 한인이 많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참관인이 직접 투표 인증사진을 찍으라고 권했다. 서현승 씨는 먼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분도 있다는 참관인의 말을 전했다. Ⓒ 서현승

미국 애리조나에서 유학 중인 서현승(25) 씨는 지난달 28일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했다. 서 씨는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9시간을 운전해 로스앤젤레스(LA) 투표소로 향했다. 그는 "1분도 걸리지 않는 투표였지만, 왕복 17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며 "밤새 운전을 해 아침에 도착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투표장을 찾아 놀랐다"고 말했다. 

서 씨가 먼 거리를 달려 투표한 이유는 ‘걱정이 되어서’다. 20대의 투표율이 꾸준히 낮았던 탓에 그는 ‘이번에도 SNS에서만 분노하고 투표율이 낮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었다. 본 투표보다 앞서 진행되는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해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를 독려하고자 먼 길 떠나기를 결심했다. 그는 “투표 환경이 열악하지만 1분 투표를 위해 17시간 달린 나를 보고 뭔가 느끼는 사람이 1명쯤은 되지 않을까”라며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신중하게 고민하고 꼭 투표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미국 임주혜, “내 한 표 소중히 다뤄주길”

▲ 임주혜 씨는 두 번의 재외선거를 하는 내내 “멀리 찾아와서 건넨 투표지가 제대로 전달되고 처리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 없다”며 우려를 표했다. Ⓒ 임주혜

미국 뉴욕에서 환경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임주혜(27) 씨는 지난달 29일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했다. 대한민국영사관이 있는 맨해튼은 뉴욕에 사는 젊은 재외국민 대부분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투표소는 맨해튼 양옆의 강을 건너야 하는 뉴저지와 퀸즈에만 있었다. 임 씨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 걸려 도착한 퀸즈 플러싱 투표소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지난해 총선에 이어 두 번째 재외선거를 한 그는 이번 대선에서 총선보다 강해진 재외국민 투표 열기를 느꼈다.

임 씨는 “국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 큰 의미가 있었지만, 우리의 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는 선거관리위원회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외선거 때마다 불거졌던 각종 의혹에 대한 항의의 표시다. “국민들은 이번 대선에 정말 기도하는 심정으로 소중한 한 표를 국내와 해외에서 정성껏 행사하고 있다”며 “선관위가 한 표 한 표를 소중히 다뤄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미국 김아현, "촛불 참여 못 한 사죄의 의미”

▲ 김아현 씨는 “내 소중한 한 표가 정치 쇼의 일부가 되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를 표하면서도 투표를 통해 “자긍심과 효능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 김아현

미국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는 김아현(28) 씨는 지난 28일 샌디에이고 한인회관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재외국민 투표를 했다. 투표소는 다행히 집 근처에 위치해 쉽게 갈 수 있었다. 투표소가 설치되지 않았다면 2시간이 넘게 걸리는 LA에 가야 할 상황이었다. 투표소 직원들은 유권자들을 아낌없이 환영했다.

김 씨가 투표에 열정적인 이유는 매일 자고 일어나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쇼킹'한 일들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 국면을 지켜보며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고생을 하는데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는 것. 며칠 전 SBS PD가 쓴 글을 읽고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당선된 후보를 선거규정 위반으로 무효시킬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며 걱정을 표했다. 그는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돼 자랑스러운 조국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중국 성희현, “재외선거 열기에 감동”

▲ 성희현 씨는 투표소에서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많이 만나 뿌듯함을 느꼈다. Ⓒ 성희현

중국 대련시 여순구에 사는 유학생 성희현(22) 씨는 지난 26일 중국 대련 투표소에서 재외선거에 참가했다. 유학생 동기들과 함께였다. 투표소는 성 씨가 다니는 대련외국어대학교에서 약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시내에 있었다. 그는 젊은 유학생들이 많이 투표하러 왔다며 대련시 투표 분위기를 전했다.

성 씨는 외국에 있어도 투표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는 “생각보다 재외국민 투표 환경이 잘 조성돼 있어 어렵지 않게 투표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처음에는 투표하는 사람이 많이 없을 거라 예상하던 성 씨였다. 그러나 투표소에 계속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본 그는 많은 이들이 대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 정원희, “영사관의 배려로 투표를 쉽고 편하게”

▲ 정원희 씨뿐만 아니라 상하이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유학생들은 영사관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투표할 수 있었다. Ⓒ 정원희

중국 쑤저우에 거주하고 있는 유학생 정원희(25) 씨는 지난 4월 30일 주 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했다. 정 씨는 지난 2월 중국으로 출국하여 유학 중이다. 그가 거주하고 있는 쑤저우가 투표장소 상하이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져 있어 투표하기가 쉽지 않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영사관 측의 배려로 정 씨를 비롯한 유학생들은 무사히 투표를 마쳤다. 정 씨는 “영사관 측에서 유학생들을 위한 단체로 버스를 보내 투표장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며 “투표장에서도 친절한 안내와 설명으로 투표를 쉽고 편하게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재외국민의 소중한 한 표를 전달하기 위한 영사관의 노력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기획·취재 : 고륜형, 박기완, 박상연, 손준수, 박수지, 이연주, 조은비
개발 : 박진우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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