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바게트, 광화문, 알면서 모르는 척, 기억, 전쟁

▲ 고하늘 PD

소녀가 황소와 마주 섰다. 3월 8일, 뉴욕 월스트리트를 상징하는 황소상 앞에 ‘두려움 없는 소녀상’이 세워졌다. 여성의 날을 앞두고 세워진 소녀상에 이목이 쏠렸다. 소녀상 조각가 크리스틴 비스발은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 문화가 강한 월스트리트 한복판에서 소녀상은 ‘이봐, 우리 여기 있어’라고 외치고 있다”라고 했다. 월스트리트 금융사가 남성 위주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걸 비판한 것이다.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 1만 5천여 명이 뉴욕 러트거스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뉴욕 거리를 행진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하루 12시간에서 14시간씩 일했지만 남성 노동자보다 임금은 턱없이 낮았다.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다 화재로 숨졌다.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빵’은 생존권이고, ‘장미’는 참정권이다. 이 자리에 모인 여성이 원하는 건 간단했다. 배를 채울 바게트와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이었다.

2017년 3월 8일, 한국 여성 노동자들이 ‘총파업: 여성 없는 하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거리로 나왔다. 하던 일을 멈추고 광화문 광장에 모여 조기퇴근 시위를 했다. 성별 격차 없이 노동의 몫을 균등하게 분배하자고 요구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성차별은 여전하고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도 낮다. 10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성은 여전히 빵과 장미를 달라고 소리친다.

한국은 유별나게 성차별이 심한 나라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 격차 지수는 144개국 중 116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매년 발표하는 ‘성별 임금 격차’에서 한국은 15년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성평등 실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의 ‘빵과 장미’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성이 봉기한다는 것은 인류가 봉기한다는 것. 더는 틀에 박힌 고된 노동과 게으름, 한 명의 안락을 위한 열 명의 혹사는 없다. 삶의 영광을 함께 누리자. 빵과 장미, 빵과 장미.’ 남성은 알면서 모르는 척해왔다. 여성이 빵과 장미를 손에 쥐는 것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어 전쟁할 것이 아니라 함께 인류적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 소녀가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 고하늘

뉴욕 월스트리트에 세워진 소녀상은 금방이라도 돌진해 올 것 같은 황소상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소녀는 외친다.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이 작은 소녀가 우리의 미래다.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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