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촛불집회, 산수유, 광화문, 지하철역, 전쟁

▲ 안윤석 PD

“남자에게 참 좋은데 말할 방법이 없네?” 망할. “야근하기 싫은데 말할 방법이 없네”다. 밤 11시다. 토요일, 내가 일하는 승리마트는 6시에 문을 닫았다. 촛불집회가 있어서다. 과일파트 주임도, 정육파트 막내도 초를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갔다. 저마다 광장의 캡틴아메리카로, 토르로,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해 거대한 세력과 싸울 테지. 그런데 어벤져스에서 빠져선 안 될 헐크는 어디 있냐고? 헐크는 지금 음료 코너에서 산수유 팩을 정리하는 중이다. 낮에 헐크로 변신한 죄책감에 대한 반성이랄까. 오늘 후임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화를 냈다. 후임의 눈물마저 보았다. 야근까지 시킬 순 없었다. 야밤에 내가 산수유 팩을 정리하고 있는 이유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영웅들의 싸움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눈길을 줄 틈이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게다. 지금 나에겐 승리마트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2년이란 비정규직 계약이 끝나간다. 후임이 잘못해도 내가 잘못한 것 같이 찔리는 요즘이다. 점장님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순간 끝이다. 언제 길바닥에 나앉을지 모른다. 지금 당장은 산수유 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각종 음료수들을 제대로 정리해 누가 봐도 깔끔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우선이다. 특히 손님들보다 점장님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 재계약에 성공하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비정규직인 내겐 이기는 길이다. 이제 산수유 2박스만 정리하면 된다. 망할 놈의 산수유. 하나 까먹어 버릴까 보다.

반복은 사람을 멍하게 한다. 산수유를 쌓고 있자니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란 생각이 퍼뜩 든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점장이 또 언제 어디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3시 45분에 벌어진 일만 해도 그렇다. 태극기를 들고 계신 어르신들이 홍삼과 산수유 팩을 들었다 놓았다 하시며 옥신각신하다 그냥 나가버리신 후였다. 흩어져버린 산수유와 홍삼 팩들. 이때 점장만 오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평화로웠을 테지만 아니나 다를까 점장은 과일파트를 돌아 음료 코너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 6초, 점장이 음료 코너를 지나치는 시간이다. 산수유 진열대 앞에 서서 어떻게 잘 가리면 될 것이다. 산수유 앞에 섰다. 정리하기엔 너무 늦었다. 1초, 2초, 3초... 마지막 6초. 잘 넘겼다 생각하는 순간 점장의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 “쯧쯧쯧”이란 소리가 내 머릿속 프리즘을 통과했다. ‘점수가 깎였을까. 내 재계약은 어떻게 되지?’와 같은 질문들이 무지개처럼 나왔다. 질문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점점 커졌다. 그렇게 난 헐크가 되었다. 그리고 후임에게 화를 냈다.

시인 김수영 씨가 고깃국에 기름만 들었다고 울분을 토하셨다 했나. 난 고깃국보다 5000원 더 싸고 맛도 없는 산수유 팩의 흐트러진 모습에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특히 며칠 후면 재계약을 앞둔 나로선 1200원짜리 산수유 팩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정리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도 언제든지 유통기한이 다 된 산수유처럼 교체될 수 있는 게 내 신세다. 물론 노조가 있다.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난 보호받을 수 없다. 비정규직은 노조에 가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입한다 하더라도 내가 목소리를 내긴 힘들다. 정규직 직원 눈에 난 곧 나갈 사람일 뿐이다. 보호하는 사람도 보호 받는 사람도 오로지 나다. 그래서 불안하다. 내 안의 헐크는 그 불안을 먹고 자란 셈이다.

▲ 오늘만큼은 내가 광장의 영웅이다. 나를 따르라. ⓒ Pixabay

밤 1시다. 이제 누가 봐도 음료 코너는 깔끔하다. 내일 점장이 보기만 하면 된다. 마트 문을 닫고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가려는데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란 노랫소리가 들린다. 광장의 어벤저스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세력들과 싸우고 있는 소리다. 광장을 향해 난 소리쳤다. “난 산수유와 싸워 이겼어. 하얗게 불태웠다고!!” 유달리 환한 보름달을 쳐다봤다. 오늘 봤던 어르신들, 혀를 차는 점장. 눈물 흘리는 후임, 산수유를 쌓고 있는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노래 속에 ‘꿈’이라는 단어가 날 잡았다. 마트 문을 다시 열었다. 양초와 산수유 4개를 집어 들고 나왔다. 오늘만큼은 저 광장이란 전쟁터에 같이 참전하고 싶다. 속에만 담아뒀던 ‘꿈같은 말’들도 오늘을 빌려 외칠 생각이다. 내일이 되면 또다시 불안을 먹고 살아갈 나일 테지만, 지금 헐크가 되어 활약할 곳은 더 이상 음료수 진열대가 아니라 광장이다. 길을 비켜라, 헐크가 나가신다.


편집 :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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