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함무라비 법전

▲ 박수지 기자

박근혜 국정 실패의 핵심 위치에 있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 구속영장이 또 기각됐다는 뉴스에 함무라비 법전이 떠오른다. B.C 1770년대 바빌로니아 제국 왕 함무라비는 282조의 법전을 펴낸다.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표현되는, 내가 당한 만큼 보복한다는 복수법으로 잔인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쐐기 문자로 빼곡히 쓰인 발문에는 애민정신이 묻어난다. 특히 서문에서 밝힌 법전의 제정 취지가 눈길을 끈다. "태양신 샤마쉬가 이 세상에 빛을 준 것처럼 백성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정의를 주노라. 그리하여 강자가 약자를 못살게 굴지 않도록, 과부와 고아가 굶주리지 않도록, 평민이 관리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 함무라비 법전의 윗부분. 함무라비가 태양의 신 샤마쉬로부터 법전을 받고 있다. ⓒ 위키피디아

1974년 우리나라에는 법이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사법 살인’이라 불리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유신반대 투쟁을 벌이던 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25명에게 남한 내 지하조직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으로 재판에 부쳤다. 주동자로 지목된 8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그로부터 33년 뒤 2007년, 재심에서 25명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2009년 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가해자인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2년 후, 대법원은 지급된 국가배상금이 지나치게 많다고 판결을 뒤집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국가는 피해자들에게 반환 소송을 걸었다. 법무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초과 지급된 배상금의 반환을 청구한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달았다. 33년간의 억울함은 다시 빚더미가 돼 돌아왔다. ‘법’의 피해자였던 그들은 ‘법’ 앞에서 또 한 번 짓눌렸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다른 사람을 거짓 고발한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 ‘만약 공직자의 판결이 잘못된 게 드러나면 그 공직자는 벌금을 물고 영원히 판사석에 앉지 못하도록 규제하라’함무라비 법전 중 공직자의 도덕성을 강조한 대목이다. 인혁당 사건의 가해자는 국가였고, 사법이었고, 담당 판검사였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두 번 우는 사이 처벌받은 가해자는 없었다.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법의 횡포는 유신독재 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며 제멋대로 주무르는 행태는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 심심찮게 눈에 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간첩조작 사건은 계속되었고, 재벌과 권력자들은 불법을 저질러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거나 ‘법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권력의 입맛대로 사건을 처리한 법조인들은 승승장구 날개를 달았다. 잘못된 용기는 넘치되 부끄러움은 모르게 된 이들이 출세하는 동안 검찰과 법원은 망가졌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전횡은 이런 연장선에 놓인 빙산의 일각이다.   

우리는 함무라비 법전의 시대인 3천 8백 년 전보다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법이 인권을 짓누르고, 정경유착이 정상으로 비친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가장 먼저 견제하고 바로잡았어야 할 청와대 민정수석이 두 번씩이나 영장이 기각되는 현실에 법치 원칙은 간 곳 없다. 그리스 신화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저울이 권력 편으로 기울고, 칼끝이 시민을 향하는 세상에서 과연 ‘법’은 정의의 편인지 되묻는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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