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부산 산복도로·이바구길

‘다리 아픔’을 보상하고도 남을 탁 트인 전망

부산은 해변에서 시작해서 산골짜기와 산등성이로 기어 올라간 도시다. 금정산 백양산 엄광산 구봉산 등 높이 300∼600m의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지만 그 연봉 너머로 도시가 팽창한 지 오래다. 종아리 굵어질까 걱정하는 중학생이든 가파른 길 노심초사하는 운전자든 부산의 구릉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러나 관광객에게는 부산의 옛 모습이 살아있는 곳이고 무엇보다 탁 트인 시선을 제공하는 것이 일품이다. 한겨울에도 등에 땀 한 줄기 내게 하는 산복도로에 오르면 부산의 역사는 덤으로 보인다.

▲ 부산의 대표적인 산복도로는 서구 서대신동과 부산진구 범천동을 잇는 ‘망양로’인데 부산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민수아

부산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도로

산복도로는 이방인이 모여든 부산의 특성을 보여준다. 매축으로 형성된 토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인의 구역으로 개발되었다. 개항기를 거치며 부두노동자로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외지인들은 산지를 따라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하고 정착했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은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동구 초량동과 수정동에 작은 마을을 만들었고,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서구 동대신동, 중구 영주동까지 확장됐다. 인구가 늘자 차가 다닐 도로가 필요했고 1960년대 산의 배 언저리를 따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이 만들어졌다. 바로 산복도로(山腹道路)다.

▲ 산복도로 옆으로 난 주차장은 건물의 옥상인 경우가 많다. ⓒ 민수아

‘이바구’ 모아 만든 관광 코스

부산시는 2011년 산복도로 일대 주거지 정비에 들어섰다. 부산 동구는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라는 마을재생사업을 펼쳐 고지대 지역자원을 활용한 관광 코스를 몇 개 만들었다. 이 중 하나가 ‘초량 이바구길’이다. ‘이바구’는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다.

부산역 뒷골목에 들어서면 옛 백제병원부터 시작하는 ‘초량 이바구길’을 만날 수 있다. 백제병원은 일제강점기 최용해 씨가 부산 최초 근대식 종합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의료사고 문제로 문을 닫은 뒤 중화요릿집, 일본 부대 장교 숙소, 예식장 등으로 이용되었다. 1972년 불이 난 뒤 상가로 쓰이다가 지금은 1층을 카페로 꾸몄다.

▲ 백제병원은 1922년 문을 연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이다. ⓒ 민수아

표지판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면 이바구길에서 가장 유명한 ‘168계단’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찔한 높이와 경사에 보는 순간 압도된다. 지난해 개통한 모노레일 덕에 2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계단 초입에서 사진만 찍고 계단을 오르지 않는 관광객과 달리 모노레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걸어 내려오는 마을 주민들이 눈에 띈다. 초량동에 사는 박동현(13) 군은 “8명 정도밖에 타지 못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답답해서 내려갈 때는 그냥 계단으로 걸어간다”고 말했다.

▲ 168계단 앞에서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 민수아

모노레일을 타고 순식간에 언덕을 오르면 배 모양을 본떠 만든 ‘이바구공작소’가 나온다. 산복도로 사람들의 삶과 지역 문화 자원을 모으는 아카이브 센터다. 2013년 개관한 이곳은 자료 수집과 전시 등 지역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168계단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 2분 정도 타고 올라가면 전망대와 카페가 있다. ⓒ 민수아

지역 문화 자원을 모으는 것이 설립 목적이라 알려졌지만 이바구공작소는 관광객의 ‘인증샷’을 위한 장소다. 포털 사이트에 ‘이바구공작소’를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이바구길 교복’과 ‘초량 옛날 교복’이 뜬다. 이바구공작소는 이용료를 받고 70년대풍 교복을 빌려준다. 이바구공작소를 방문하여 만난 관광객도 모두 교복 차림이었다. 대구에서 온 대학생 김지현(21) 씨는 “SNS에서 친구들이 올린 사진을 보고 재미있어 보여 찾아왔다”며 같이 온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 이바구공작소는 1,000원을 내면 1970년대풍 교복과 교련복을 빌려준다. ⓒ 민수아

초량 이바구길은 부산시 동구와 인연이 있는 인물을 위한 관광지도 포함한다. ‘장기려 기념 더나눔 센터’는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가진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공간이다. 평안북도 용천군 출신인 그는 부산에 고신의료원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 진료했다. 한국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동구에 설립하기도 했다.

망양로 한가운데 있는 ‘유치환 우체통’은 경남여고 교장을 역임하고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로 타계한 청마(靑馬) 유치환 선생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3층에 설치된 ‘그리움이 있는 우체통’은 1년 뒤 수취인에게 전달되는 느린 우체통으로 바로 옆에 그의 대표작 <행복>이 새겨진 시비가 있다.

▲ 거제도에서 태어난 유치환은 1940년 만주로 피신했다가 해방 후 부산 등지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했다. ⓒ 민수아

‘고관 입구’ 지명의 유래

‘초량 이바구길’ 말고도 부산 동구가 만든 테마 길이 여럿 있다. ‘수정 이바구길’은 부산진역에서 수정배수지까지 2.1㎞ 코스로 지난해 3월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 코스는 부산진역-봉생병원-매축지기념비-부산일보-수정전통시장-정란각-수정배수지로 이어진다.

고관 입구 근처의 정란각은 ‘수정 이바구길’의 유일한 등록문화재다. 고관(古館)은 두모포 왜관이 폐쇄되고 초량으로 옮겨진 뒤, 본래 왜관이 있던 지역이라는 뜻에서 붙은 지명이다. 두모포 왜관은 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1607년 지금의 수정시장 인근 포구인 두모포 일대에 설치되었다. 1678년까지 70여 년간 대일외교의 유일한 통로로 사신접대, 대외무역, 왜인들의 숙박장소로 기능했다.

▲ 두모포 왜관 기념비에 그려진 동구 지도에 ‘고관’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 민수아

정란각은 일본식 2층 기와집 건물로 고급 요정이었다. 1939년 부산철도청장 관사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2011년 문화재청 조사 결과 일본인 재력가 다마다 미노루가 1943년에 일식가옥으로 재건축한 것이 확인됐다.

▲ 일본식 가옥 정란각은 등록문화재 제330호다. ⓒ 민수아

정란각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로 사용되었다. 근대 주택 건축사 자료로 가치가 높은 이곳은 현재 내부를 카페와 숙박시설로 꾸며 운영하고 있다. 정란각과 같은 건물을 적산가옥이라 한다. 적산(敵産)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을 뜻하는 말로,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건물을 가리킨다. 일본의 침략 발판이 되어 근대 도시로 성장한 부산에는 일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호랭이 없는 ‘호랭이 이바구길’

1876년 개항 이후 들어선 일신여학교•부산진교회•일신기독병원 등 근현대자원이 풍부한 ‘부산포 개항가도’를 지나면 동구와 부산진구 경계에 ‘호랭이 이바구길’이 나온다. 호랭이 이바구길은 안창마을 등 범일동 일대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에서 이름을 따왔다. 범일동(凡一洞) 지명은 범천(凡川)에서 유래한다. 범천은 하천 주위에 호랑이가 나타나 붙여진 이름이다.

▲ 일신여학교는 부산•경남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로 부산 최초의 항일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 민수아

범일동 인근에는 삼화, 국제, 태화고무 등 신발공장이 많았다. 공장의 주된 노동력은 젊은 여공이었다. 부산 동구는 여공들이 많이 거주했던 안창마을과 범일동 골목 사이를 ‘누나의 길’이라 이름 짓고 골목 바로 앞에 ‘신발박물관’을 세웠다. 신발박물관은 부산의 신발산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 이야기를 담았다. 범표•기차표•말표•국제상사의 고무신, 운동화들이 당시 신발광고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안창마을, 범일동 인근에는 신발공장의 여공들이 많이 살았다. ⓒ 민수아
▲ 범일동 신발박물관에 고무신이 전시되어 있다. ⓒ 민수아

범일동의 산업 역사와 ‘호랭이 이바구길’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겉도는 느낌이다. 이 일대 신발공장, 방직공장에 관한 이야기로 초점을 모았더라면 어땠을까? 전설로만 남은 호랑이가 동구에서 관광지로서 내세울 만한 자원인지 선뜻 이해가 안 간다.

범일동에 신발공장만큼 유명했던 것이 조선방직이다. 조선방직은 일본 자본이 1917년 설립한 한국 최초 기계식 면방적 회사였다. 지금도 부산 시민들은 조선방직이 차지했던 범일2동 일대를 ‘조선방직앞’을 줄여 ‘조방앞’이라 부른다. 범일동 주변에 보이는 여러 간판이 이를 증명한다.

▲ 범일2동 일대에는 ‘조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상호를 쉽게 볼 수 있다. ⓒ 민수아

조선방직은 민간기업인 동시에 총독부의 국책기업으로 수천 명 노동자의 일터로 성장했다. 이승만 정권 수립 후 처음으로 대규모 파업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이승만 지지자인 사장 강일매가 20년 이상 근속한 숙련공과 노동조합 간부를 무단해고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려 하자 노동자들은 ‘폭군 강일매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1951년 12월 19일 쟁의에 들어갔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했지만 이후 노조 간부를 구속하고 강일매는 유임되었다. 이에 총파업을 결의한 6천여 노동자들은 대한노총의 파업 번복선언을 아랑곳하지 않고 3월 12일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경찰의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69년 7월 부산직할시가 법인 청산 절차를 밟아 조선방직을 공식 해산하면서 부산시민의 대표적인 일자리였던 조선방직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흔적은 ‘조방앞’이라는 행정구역에도 없는 지명으로 시민들 기억 속에 남았다.

억지스러운 관광 코스를 개발하기보다 역사성이 뚜렷한 장소에 집중해 지역의 생기를 다시 찾는 게 도시재생의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부산 동구는 2월 1일 좌천동 성북시장에 ‘웹툰 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젊은이들이 떠난 원도심에 상권을 살려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겠다는 포부가 느껴진다. 하지만 맥락 없는 개발을 의아해하는 지역주민도 있으니 주민과 관광객 모두가 반기고 즐기는 방향으로 도시재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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