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강연회

김소란, 김순악, 박영심, 문옥주, 배봉기, 김복동, 김옥주, 송신도, 박옥련, 하상숙. 80여 년 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죽음보다 아픈 세월을 모질게 견뎌내야 했던 여성들이다. 부끄럽게도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의 일부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와 함께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이하 <‘위안부’ 이야기>)>를 펴냈다. 앞서 언급한 ‘위안부’ 피해자 10명의 증언과 사료를 토대로 ‘위안부’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헤친 성과다.

▲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 앞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 신혜연

끌려갈 때 15살이었는데… 돌아오니 22살  

지난 22일 오후 2시,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는 위안부 기록물의 의미를 시민들과 나누는 강연회가 열렸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회의실은 복도까지 시민들로 북적였다. 입구에는 ‘위안부’ 역사를 정리한 자료들이 늘어섰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보내는 쪽지 공간도 마련됐다. 김혜빈(23·경기도 구리시) 씨는 쪽지에 ‘언제나 행동하겠습니다’라고 힘 있게 적었다. 김 씨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라고 생각해” 오늘 행사장을 찾았다고 밝혔다.

▲ 시민들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쪽지를 남겼다. ⓒ 신혜연

이날 강연회 앞줄에는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91) 할머니, 박원순 서울시장, 평화나비 네트워크 서울지부 공동대표 문수빈(21), 문교창(21) 씨가 자리를 잡았다. 김 할머니는 대회의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한 맺힌 일생을 털어놓았다.

“15살에 끌려갔습니다. ‘공장이라는데 뭐 죽기야 하겠나’ 하고서 간 곳은 공장이 아니라 일본군을 상대하는 공장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부대가 옮길 때마다 따라가다가 싱가포르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풀려나긴 했는데,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어디로 가나요. … 근근이 목숨만 살아서 돌아오니 나이도 몇이나 먹었는지 몰랐는데, 집에 오니 제가 22살이라 하더라고요.”

김 할머니는 아직 사과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와 ‘위안부’ 문제 수습에 미온적인 한국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던졌다. “암흑 속에서 살아 돌아온 우리가 1억 원 받으려고 그런 고생을 했겠습니까. 돈이 문제입니까.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합니다. 돈벌이로 갔다, 민간인이 한 일이다, 그런 식이에요.”

김 할머니의 피맺힌 절규는 이어졌다. “합의할 때는 마땅히 우리한테 물어야 안 되겠습니까? 한 마디도 없더니, 전화로 해결 지었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소녀상도 철거하고, ‘위안부’도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고 해서 펄쩍 뛰었거든요. 절대 할 수 없다. 돈 받을 수가 없다. 100억이 아니라 천억을 줘도 우리는 받을 수가 없다. 취소하라고 1년 동안 싸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있어요.” 김 할머니의 연설에 청중들은 숙연해졌고 일부는 훌쩍였다.

▲ 김복동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정부를 비판했다. ⓒ 신혜연

시민법정 검사였던 박원순 시장 “10년간 달라진 거 없어”

김 할머니에 이어 박 시장이 연단에 섰다. 박 시장은 2000년 12월 시민사회가 마련한 여성국제전범법정의 남측 대표검사로 참여했던 경험을 언급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당시 법정은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 등을 피고로 세웠다.

박 시장은 17년 전 법정 이후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을 꼬집었다. “할머니들이 평화운동가가 되어 반세기를 싸웠지만, 아직 일본은 진정한 사과와 법적 배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12·28 협약을 맺었고, 화해 치유 재단을 만들어 할머니들께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줬습니다. 이제 생존해 계신 피해 할머니들은 39명뿐입니다. 할머니들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를 원합니다. 생존자뿐 아니라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위해서, 또 다음 세대를 위해서 정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 서울시에서 발간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집(왼쪽)과 관련 강연회 홍보 팸플릿(오른쪽). ⓒ 신혜연

서울시에서는 박 시장 취임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사업을 꾸준히 펼치는 중이다.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예산을 보태고, ‘위안부’를 기리는 장소인 ‘기억의 터’를 마련했다. 이번 <‘위안부’ 이야기> 등 기록물 관련 사업도 이런 활동의 일환이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강성현 교수의 강연이 이어졌다. 강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끄집어냈다. “전시에 여성을 동원한 역사는 그냥 과거가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현재화된 과거사입니다. 할머니들이 아직 살아 계십니다. 피해 여성인 할머니들이 주체가 되는 과정이 있었고, 우리 앞에 서기까지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50년 넘게 할머니들이 침묵을 강요받던 한국사회의 역사가 겹쳐지는 것이고요.”

▲ 강연장이 청중들로 가득 들어찼다. ⓒ 신혜연

중국부터 미얀마까지…전 세계로 끌려간 ‘위안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일제가 벌인 태평양 전역 전쟁터로 끌려다녔다. 강 교수는 <‘위안부’ 이야기>에 실린 ‘위안부’ 여성들의 행로를 보여줬다. 1941년 진주만 폭격을 시작으로 일본군은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해역으로 마수를 뻗쳤다. 전쟁 발발 6개월 만에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넘어 미얀마까지 침략군을 보냈다. 그만큼 ‘위안부’의 험난한 여정도 길어졌다. 미얀마에 파견된 ‘4차 위안단’에는 문옥주 할머니도 포함됐다. <‘위안부’ 이야기>에는 문 할머니 이야기가 실렸다.

일본군이 미얀마까지 위안부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다양한 증거를 통해 입증된다. 1944년 8월 미군 사진병인 시어러는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 사진에는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과 일제와 공모한 업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 함께 찍힌 미군 장교 ‘챈’은 미국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냈다. 여기에 당시 ‘위안부’ 여성들을 위한 고별파티를 열었더니 여성들이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미국 정보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존재를 파악한 문서까지 발견됐다.

▲ 1994년 8월 시어러 병사가 남긴 일본군 ‘위안부’ 사진. ⓒ 신혜연

명백한 사실이지만 ‘위안부’ 역사는 오늘도 전혀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강 교수의 문제 제기다. “1975년 배봉기 할머니, 82년 이남님 할머니, 84년 노수복 할머니, 84년 배옥수 할머니 등 91년 김학순 할머니 전에도 ‘위안부’ 증언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 반응은 어땠나요? 오히려 ‘부끄러운 줄 알라’며 폭언을 쏟아냈습니다.” 강 교수는 한국 정부가 단 한 번의 ‘위안부’ 실태조사도 없이 신고주의를 고집하며 자발적인 신고만을 받아온 점도 큰 문제라고 비판한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거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을 ‘시작’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강 교수의 바람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민주주의와 페미니즘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위안부’ 역사를 짚어보는 강연을 이어갔다. 2000년 11월 여성가족부가 지정한 ‘위안부’ 생활지원 대상자가 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보자. “늦게나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피해자로서 이해하는 정부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비로소 삶의 위로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 대상자 결정 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두고 보고 또 보았다. 나라에서 나를 위안부 피해자라고 인정해준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준 것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김 할머니를 보고 ‘위안부’ 경험을 증언할 용기를 냈다.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날이 올까? 문교창 평화나비 네트워크 서울 공동대표는 정부 역할에 무게를 둔다.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고, 한국 정부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변하는 정부가 돼야지요”. 박정애 교수는 정부의 역할과 함께 사회적 분위기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는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 튼튼할 때 비로소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소수자 목소리를 들어주는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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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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