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박상규·박준영 ‘지연된 정의’

계란으로 바위 치기. 불가능한 일을 무턱대고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계란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던진 계란은 깨지며 바위를 더럽힐 수 있다. 내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는 무모한 일이 아니라 ‘그럼에도 계속해야 하는 일, 희망을 가지고 작은 균열을 내는 일’이다.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가 쓴 <지연된 정의>는 계란으로 바위를 더럽히는 일의 의미를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바라보기

<지연된 정의>는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달았다. 책은 세 건의 사건(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의 재심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담았다. 모두 불가능하다는 사건의 재심을 받아내면서 두 사람은 직접적인 물증이나 단서 없이 의심만으로 살인범이 된 수사 과정에 주목했다.

▲ '재심 프로젝트'는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을 다뤘다. 세 사건의 피의자들은 모두 미성년자였거나 20대 초반이었고 본인 혹은 부모에게 장애가 있었으며 부모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 다음 스토리펀딩 화면 갈무리

“변호사나 기자나, 그냥 보면 안 보이는 걸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줘야 해요.” (p.26)

김신혜 사건 보도를 고민하던 박상규 기자에게 박준영 변호사가 던진 말이다. 박 변호사의 말은 현재 변호사, 기자가 안 보이는 세상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있나, 이면의 진실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반성하게 한다. 두 사람의 행보는 그냥 보면 안 보이는 세상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기자고, 변호사임을 증명한다. 동시에 넌지시 묻는다. 우리가 어떻게 진짜 시민이 될 것인지. 그들의 답은 이렇다. “시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해야 한다!” 그들은 말한다. 진실을 드러내려는 자, 진실을 보려 하는 자가 함께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

미국의 법률가 조지 위커샴(George Wickersham)은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은 때로 정의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약자들을 인간답게 대하며, 그냥 보면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며 실체적 진실을 밝혀낸다. 살인자로 몰렸던 이들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공감을 바탕으로 진범의 진술을 이끌어 내고, 피해자와 피의자 모두를 위로하는 해원의 시간도 마련한다. 이들에겐 정의를 좇는 것 못지않게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 또한 정의롭다.

책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말한다. <지연된 정의>는 하루라도 빨리 억울한 사법 피해자의 삶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조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자백이 어떻게 나왔는지 사회적 약자들이 범죄자로 몰리는 세상 이면의 맥락을 보여주며 진실을 꼼꼼히 짚어낸다. 진실을 밝히는 일,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지난하지만 결국 실체를 밝혀낸다. 책은 활약상을 시간 순서대로 구성해 논픽션의 재미와 서사의 즐거움을 준다. 이야기에 빠져 흥미롭게 읽다 보면, 정의를 구현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계란으로 바위를 더럽힐 수 있다

▲ '지연된 정의'는 다음 스토리펀딩 기획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를 단행본에 맞게 고쳐 쓰고, 세 건의 재심 사건을 다뤘다. ⓒ 후마니타스

책의 말미는 ‘재심 프로젝트 3부작’ 모두 법원으로부터 재심 확정과 결정을 이끌어 냈으나 그럼에도 쉽게 바뀌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여전히 ‘서민들 범죄’의 인권유린 사례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여론을 통해 말이다. 세상이 정의롭게 바뀌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했을까. 아니다. 시민의 뜨거운 호응이 따랐다. 다음 스토리펀딩 기획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에 시민 1만 7천여 명이 동참해 약 5억 6790만원의 후원금을 모았고 2016년 12월 기준, 후원금과 후원자수 모두 다음 스토리펀딩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앞으로 박 변호사는 부산, 충북 충주에서 벌어진 억울한 이들의 사건의 재심을 추진할 예정이다.

스토리펀딩으로 진행된 재심 프로젝트를 담은 <지연된 정의>는 손으로 한 장씩 넘길 수 있는 기록물로 남았다. 기록물이 주는 힘은 역사, 바로 ‘남는다’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적 인물의 과오를 기록해 세상이 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한다. <지연된 정의>는 세 재심사건에서 잘못된 판결을 내렸던 재판부와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를 진행하지 않은 수사기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굳건한 공권력의 잘못과 사회적 약자에 냉랭한 사회 현실의 생생한 기록이 당장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바위를 더럽혀야 한다.


편집 :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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