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역사

▲ 윤연정 기자

“힘을 동반하지 않는 외교는 열매가 없다. 하지만 외교를 동반하지 않는 힘은 지속력이 없다.”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슐츠의 말이다. 지속을 위해 유화책이 종종 필요한 이유다. 각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대립하는 경색된 상황에서도 ‘사연을 담은 역사’는 외교 현장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빚는다. 이야기가 불러오는 호기심과 흡입력 때문일 테다. 역사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포(老鋪)를 비롯한 특징적인 역사적 사건들, 유물과 소장품들은 현재의 인연(因緣)을 더 깊고 유구하게 만든다. 역사가 만든 인연의 가치를 공감하기 때문이다.

‘음수사원(飮水思源) 한중우의’.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이 항저우 인근 저장성 하이옌(海鹽)을 찾았을 때 남겼던 글귀다. ‘물을 마실 때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강조하며 한·중 관계의 중요성을 드러내준다. 2016년 9월, 중국 항저우 G20 정상회의 당시 시진핑 국가 주석은 김구 선생과 중국의 긴 협력을 언급하며 양국의 인연을 부각시켰다. 한국과 미국의 친밀한 관계를 이유로 중국과의 유대를 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다. 시 주석의 유명한 역사 외교화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역사는 속이 깊으면 깊을수록, 지평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 다른 나라와 관계를 풀어나갈 여지가 그만큼 깊고 넓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이야기’로 공감을 끌어낼 외교대상을 어디까지라고 정하고 있을까? 보통 ‘한반도’와 그 주변만을 지리적 틀 안에서 고려하기 십상이다.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공통분모가 큰 중국, 일본, 러시아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중국 츠펑을 중심으로 형성된 홍산문화권에 대한 이해를 넓히면 우리역사의 지평이 동북아시아에 머무는 게 아니라 유라시아를 지나 유럽까지도 확장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단적인 예로 거석(巨石)문화를 들여다보자. 프랑스 북서부 대서양 연안 어촌인 카르나크와 우리 고창 화순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 놀랍지 않은가? 카르나크에서 발견되는 지석묘가 고창 화순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흔히 지석묘가 한국 청동기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 유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지석묘는 약 6000년 전부터 카르나크 중심의 서부유럽에서 시작해, 동유럽과 시베리아를 거쳐 몽골초원과 내몽골, 요령성의 홍산문화권에 전파된다. 이어 한반도 전역으로 퍼진 문화유산이다. 한국 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뿌리 가운데 하나가 서유럽에서 시작해 홍산문화권을 지나 고조선으로 들어온 사실이 놀랍다. 한국과 전혀 연고가 없을 거 같은 프랑스의 한 작은 어촌이 실은 몇 천 년 전부터 우리와 인연이 닿았다.

▲ 프랑스 카르나크 지역에 있는 지석묘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한국 고창·화순 지석묘는(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flickr

지난 6월 초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이 열렸다. 국빈방문은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양국 간 우호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문화, 경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모색하는 취지로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K콘 2016 프랑스’에 참여해 창조경제 및 문화융성에 관심을 보였고, 정상회담 뒤 프랑스 유학시절 모교도 찾았다. 하지만 거창한 명분과 달리 콘텐츠 빈곤과 급조 분위기를 비판받았다. 그르노블 대학에서 경제발전만을 외친 박 대통령의 연설은 문화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았다. 급기야 최순실 관련 기업 혜택 문제까지 불거져 ‘K콘 2016 프랑스’ 행사는 애물단지를 넘어 흉물로 전락한 상황이다.

카르나크 지역과 인연을 차치하고서라도 한국과 프랑스는 긴 시간을 함께 나눴다. 대원군시절 1866년 프랑스 신부들에 대한 종교 박해, 그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조치로 터진 병인양요의 갈등. 이어 일제치하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프랑스 측 지원 같은 협력도 빼놓을 수 없다. 대통령이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6개월의 인연보다 훨씬 길다. 본인이 잠시 다닌 대학을 방문하는 것을 넘어 유구한 역사문화의 연(緣)에 대해 얘기했다면, 프랑스와 훨씬 더 부드러운 대화를 이끌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진정성 있는 경제협력도 피어난다. 이제 우리는 안다. 긴 시간을 우려내 만든 ‘차’를 나눠 마시기에 우리나라 대통령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는 것을. 국격을 높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시간이 정성스레 우린 역사라는 ‘차’를 적절하게 마실 수 있는, 즉 활용할 수 있는 안목이 우선이다. 그래서 로마의 키케로는 ‘역사는 삶의 스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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