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국정에 갇힌 역사

▲ 강민혜 기자

인조 1년(1623), 서인인 이수광과 이정귀 등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의 수정을 주청한다. “적신(賊臣)에 의해 편찬되어 부끄럽고 욕됨이 심하다”는 이유에서다. 적신이란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북인(대북파)을 가리킨다. 북인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은 그들이 만든 실록을 인정하기 싫었다. 이이첨 등이 북인에 대해서만 좋게 서술하고, 다른 당파에 대해선 비방과 폄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한 <선조수정실록>과 <선조실록>은 차이가 크다. 인물에 대한 평가를 예로 들어보자. <선조실록>에서 ‘어버이를 뵈러 간다면서 술만 마시는 사람’이었던 류성룡은 <선조수정실록>에선 ‘학문과 덕행,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반면, 이이첨은 ‘영특하고 기개 있는 사람’에서 ‘간적의 괴수’로 무너져 내린다. 이처럼 두 실록 간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 무려 40명이다. 정권의 입맛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바람에 나타난 편향성과 폐해다.

▲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좌)과 서인이 개정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우). ⓒ 조선왕조실록 누리집

조선 시대에는 이 밖에도 3번의 실록 수정이 있었다. 집권세력이 바뀌면 역사 기록도 바뀌었다. 붕당정치로 당쟁이 격화돼서다. 남인이 작성한 <현종실록>은 경신환국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의 <현종개수실록>으로 다시 쓰였다. 소론은 노론의 생각이 반영된 <숙종실록>의 편향성을 없애겠다며 <보궐정오>라는 실록을 덧붙였다. 소론 주도로 편찬된 <경종실록>은 노론의 반발로 수정됐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왕조실록 수정 사례를 보면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떠오른다. 최근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하며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는 역사관을 가질 수 있도록 개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정교과서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기술했다. 뉴라이트 계열 보수 역사학자들의 ‘1948년 건국론’을 수용한 것이다. ‘1948년 건국론’은 단기 4349년의 고조선부터 부여, 고구려의 민족 정통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태다. 아울러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을 깎아내린다. 반면, 친일파에게 건국 공로 인정이라는 면죄부를 준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미화한 점도 문제다. 국정교과서는 유신헌법이 당시 안보 위기와 사회 불안 때문에 필요했다고 적었다. 장기 독재 정권을 위한 헌정 파괴라는 사실을 호도하는 셈이다. 이는 친일, 친독재 성향의 부적절한 집필진 선정에 따른 결과다. 실제로 교육부가 공개한 국정교과서 집필진 명단을 보면 현대사 집필진 대부분이 수구 성향의 비 역사학자다.

박근혜 정부 국정교과서의 가장 큰 폐해는 하나의 관점만 허용한다는 점이다. 조선 시대에도 그렇지는 않았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선조실록> 작성자인 이이첨 등 40명의 북인을 참수했고, 200여 명을 귀양 보냈다. 하지만 왜곡된 역사라고 비난하면서도 <선조실록> 원본을 없애지는 않았다. 현종, 숙종, 경종 대의 실록개정 때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역사서를 남겨 후대가 진실을 판단하게 하자는 이유에서다. “무고와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해서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지만, 처음과 끝을 살피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니, 후대에 기록을 보는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마친 채유후의 말이다. 당시 사람들이 역사에서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는 태도가 잘 드러난다. 하물며 지금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시대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송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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