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촛불

▲ 송승현 기자

미국 덴버대학 정치학 교수 에리카 체노우스는 "3.5%의 국민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면, 정권은 무너진다"는 '3.5% 법칙'으로 화제를 모았다. 지난 3일 전국에서 232만의 촛불이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전 국민의 4.5%다. 에리카 교수의 말대로라면, 박근혜 정권은 사형선고 정족수를 넘겨도 한참 넘겼다. 촛불민심은 박근혜 심판과 법치 회복을 넘어 한계를 보인 대의민주주의에서 직접 민주주의로의 도약을 꿈꾼다. 그러기에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다음 날 10일에도 전국적으로 수십만의 촛불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광장을 뜨겁게 달궜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의 저자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민주주의의 피로감을 선거에 의한 대의 민주주의 탓이라고 설파한다. 그는 대의 민주주의를 “선거로 선출되는 사람들은 대중을 대표하지 못하기에 ‘소수특권제’나 다름없다”며 “민중은 선거 당일에만 주권자가 된다”는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선거 민주주의는 민중에 의한 통치라기보다는 민중을 위한 통치에 머물게 된다”고 꼬집는다. 선거로 꼽힌 선출직은 민중을 대변한다는 기치 아래 실상 자신들의 정략적 이익만을 취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정유정의 2016년 신작 <종의 기원> 속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등급 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 ‘프레데터’로 진단받는다. 소위 악인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보통 악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걸 알게 된 친구를 바로 해치지 않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어긋날 때 비로소 악인의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가 자수를 권유하자 그때서야 사고사로 위장해 죽인다. “감정을 없애면 선택의 무게는 신발을 사는 일만큼 가벼워진다. 목적과 비용의 상관관계만 따지면 될 테니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웃과 공감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만을 계산하는 자’ 악인은 그렇게 태어난다. 그리고 악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 4.5%가 촛불을 들게 했다.

▲ 탄핵안이 가결된 뒤에도, 국민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추운날에도 광장에 모인다. ⓒ 송승현

악인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 뒤 정치권의 관심은 ‘조기 대선’ 여부로 쏠린다. 조기 대선이면, 마땅한 대권 주자가 없는 새누리당의 정권 재창출은 버거워진다. 친박은 비박을 ‘당을 해친 자’로 비박은 친박을 ‘최순실의 남자’로 공격하며 서로 나가라고 이전투구 하는 것도 그 결과다. 국민의 당도 조기 대선 국면은 환영할 일이 못된다. 더불어민주당은 다르다. 조기 대선이 유리하다. 여론조사 1위 문재인의 “탄핵안 가결 시, 즉시 퇴진”은 국민의 요구인 동시에 대권 주자로서의 감춰진 본심이다. 이처럼 정략적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현실에서 순수한 촛불 향연이 민주주의 회복과 직접 민주주의 확대라는 목표를 일궈 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니체는 <서광>에서 플라톤의 ‘철인 사상가’와 대비되는 ‘지하 사상가’를 내세운다. 니체는 “사상가란 이데아가 있는 동굴 밖이 아닌, 민중이 있는 동굴의 심연으로 내려가야만 한다.”고 외친다. 니체에게 있어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가는 민중의 마음과 행동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함께 하는 자다. 유시민이 "정치란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고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뤄 내는 위대한 사업"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대한민국 정치와 정치 지도자는 어떤 모습일까? 철인 사상가나 지하 사상가는 물론, 위대한 사업은 더더욱 아닌 듯하다. '3.5% 법칙'은 정치인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경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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