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가짜 객관주의와 트럼프

▲ 박찬이 기자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은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들은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주기 위해 밑바닥 계층의 삶, 전쟁에 휘말리는 개인의 비극적 삶을 소재로 삼았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를 통해 독자들은 당대 현실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알 수 있다. 그 후 기자가 전문 직업군이 되면서 저널리즘이란 영역이 생겼다. 소설가와 달리, 기자는  객관적 입장에서 사실을 보도하는 ‘객관주의’ 입장을 견지했다. 각자의 가치관과 선입관을 버리고 확인된 객관적 사실만 보도하는 자세가  뉴스의 가치를 지키고, 기자라는 직업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보루가 된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저널리즘은 객관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객관주의를 내세우지만 언론은 가끔 이 객관주의 때문에 함정에 빠진다. 미국 대선을 하루 앞둔 7일,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대부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예측했다. 뉴욕타임스는 힐러리의 당선가능성이 84%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유에스에이 투데이도 지지율 4% 내외의 근소한 차이로 힐러리 후보가 이길 것으로 예상한  조사결과를 보도했다. 트럼프 당선이 확정되자 언론이 여론조사의 허점을  간과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 연설하는 트럼프. ⓒ <가디언>

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흑인 민주당 후보 토머스 브래들리가 여론조사와 출구조사에서 백인 공화당 후보를 앞섰지만 개표 결과 패배했다. 상당수의 백인이 인종적 편견을 숨기기 위해 여론조사에서 거짓 진술을 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른바 ‘브래들리 효과’다. 1990년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흑인 후보 더글러스 와일더가 상대 백인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큰 차이로 앞섰지만, 결과는 0.37% 차이로 간신히 당선됐다.

강경한 이민정책과 에너지·외교정책 등을 거침없이 내세우고 여성혐오 발언까지 드러난 트럼프를 미국 유권자들은 속으로 지지하면서 겉으로는 힐러리를 지지한다고 거짓 진술을 했을까? ‘녹슨 지대(Rust Belt)’의 백인 노동자들은 힐러리보다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브래들리 효과만으로 이번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널리즘이 견지하는  객관주의는 종종 오류를 일으킨다. ‘트럼프 열풍’ 당시 미국 주류 언론들은 자신들이 트럼프의 막말과 기행을 보도하면서 트럼프를 스타로 만든 것이 아닌지 반성했다. 객관주의라는 미명하에 그의 막말을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바람에 트럼프를 미디어 스타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독자에게 트럼프에 대한 진실, 즉 대통령감으로 부적절한 측면을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주관주의는 경계해야한다. 상대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는  기자들은 힐러리 지지층에 속한다. 이들의 기대가 트럼프는 과소평가하고 힐러리는 과대평가하는 태도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미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대중의 관점을 언론은 놓치고 있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소득은 줄고, 개혁은 번번이 가로막히고 있다. 한때 미국을 위기로 몰아 넣었던  월스트리트는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 언론인은 자신의 기득권 때문에 기성정치에 분노하는 대중, 인종차별과 여성혐오보다 일자리 감소가 중요한 대중에게 눈감았던 것이 아닐까?


편집 :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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