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트럼프

▲ 박고은 기자

흥미로운 러시아 민담. 부잣집 옆에 사는 한 농부의 이야기다. 부자에게는 암소가 한 마리 있었다. 가난한 농부는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갖지 못할 재산이다. 농부는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하느님은 농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농부는 대답했다. "이웃집 암소를 죽여주세요."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생뚱맞은 결정을 내린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 대다수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던 독일 사회가 극단적 사례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에 짓눌린 독일은 국가 경제 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대 초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등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적 빈곤이 지속됐다. 히틀러가 정계에 뛰어들었을 때, 독일인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괴롭혀온 문제에 손쉬운 해결책만 제시한다면 누구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6년 전 “기존 정치권이 국민이 직면한 경제적 위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극단적 성향의 당이 대세를 잡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퓨리서치 센터의 ‘미국 대도시 중산층 붕괴’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55%였던 중산층 비율은 지난해 49.9%로 떨어져 1971년 이후 처음으로 50% 선이 무너졌다. 소득 불평등은 수년간 부동의 세계 1위다. 상황이 이런데도 미국 정치는 이 문제를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에 이어 클린턴 후보 역시 해결책 찾기에 소홀했다. 민심을 읽기보다는 트럼프의 자격 논란, 트럼프 후보와 공화당의 분열에 기댄 선거를 치렀다. 반면 트럼프는 명확한 메시지를 일관되게 선보였다.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다. 기성 정치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이 대통령 트럼프를 만든 셈이다.

▲ 기성 정치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이 대통령 트럼프를 만든 셈이다. ⓒ Pixabay

다니엘 이네라리티 바스크대학 교수는 저서 <분노 시대의 정치>에서 서구 사회가 ‘탈정치시대’에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라는 틀은 유효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정치는 실종됐다는 의미다. 세계화, 빈부격차, 이민자 폭증 등 국민의 삶을 위협하는 요인은 늘어 가는데 이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 ‘그들만의 정치’가 반복될 뿐이다. 유권자들은 점점 좌절감을 느낀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엘리트보다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불만을 대변하고 기득권을 몰아내 줄 것 같은 선동가를 택한다. 필리핀에서는 족벌 과두정치를 향한 반감이 로드리고 두테르테를 지도자로 만들었다. 독일의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창당 3년 만에 16개 주 중 10개 주에서 의석을 얻었다. 전 세계적인 포퓰리즘 바람은 기존 정치권의 엘리트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근본적 한계를 토대로 싹을 틔웠다.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street)' 시위. 탐욕스러운 금융산업과 치솟는 실업률에 분노한 일반 시민들이 상류층 1%의 거리를 점령한 사건이다. 전 세계 82개 국가의 95개 도시로 퍼져나간 이 운동은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부의 재분배, 일자리 대책을 논의하게 만들었다. 민주주의가 구호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 대표적 사건이다. 하지만 국민이 매번 거리로 나설 수는 없다. 국민의 목소리가 즉각 반영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 조성이 필요한 이유다. 핀란드에서는 ‘오픈 미니스트리’라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시민들이 직접 법을 제출할 수 있다. 스페인의 신생 정당 포데모스는 당의 결정을 내릴 때 온라인 의사결정 플랫폼 ‘루미오’를 통해 당원들의 의견을 듣는다. 디지털 기술과 직접 민주주의가 결합한 ‘디지털 민주주의’. 탈정치시대를 극복할 대안으로 떠오른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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