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북풍(北風), 미풍(美風)보다 센 비풍(秘風)

▲ 강한 기자

이번에는 다를까. 1997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수갑을 찼다. 2002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김홍업이 수의를 입었다. 2008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형 노건평이 구치소로 갔다. 2012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이 법의 심판을 받았다. 대통령 임기 말 약 5년 주기로 되풀이되는 측근 비리 스캔들. 이들은 모두 대법원에서 감형되거나 다음 대통령 임기에 사면받았다. 대통령이 측근 비리로 물러나거나 실형을 받은 적은 없다.

정치에서 북풍(北風), 미풍(美風)보다 센 게 비선 실세 후폭풍, 비풍(秘風)이다. 김현철 게이트는 정권이 바뀌는 기폭제였다. 김홍업의 비리로 민주당 내 비주류가 목소리를 키웠다. 뒷돈 받은 노건평 때문에 서민 대통령 노무현의 명성이 땅에 떨어졌다. 한나라당은 “봐라. 저쪽도 똑같지 않냐”며 이를 면피 삼아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는 묘수를 부렸다. 이상득 게이트를 기점으로 친박은 더 단단히 뭉쳐 지금의 박근혜를 만들었다. 정권 말기마다 검찰은 대통령의 측근을 구속해 엄벌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지난 4년간 납작 엎드려 침묵하며 권력에 빌붙은 행적을 면죄 받았다. 최순실 게이트를 두고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말하면서도 우려하는 까닭이다.

▲  2012년 12월 19일 박근혜 후보가 서울시 삼성2동 제3투표소에서 투표권을 행사하고 기자들을 향해 웃고 있다. ⓒ Flickr

물론 최순실 게이트는 이전 사건들과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헌법 1조,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원칙에 따르면 모든 비선이 똑같이 반헌법적이다. 비선이 피붙이면 괜찮고 무당이면 안 된다는 건 감정 논리다. 이러니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직권남용은 죄를 특정하기 어렵고 제3자 뇌물수수는 고의를 입증하기 어렵지 않은가. 전례 없는 사법의 향방은 여론과 분위기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청와대가 버티고 검찰이 눈치 보고 시민이 촛불 드는 이유다.

영국 총리는 수요일마다 의회에서 의원들이 쏟아내는 공격적인 질문에 의무적으로 답변해야 한다. 이 모습이 영국 전역에 방송된다. 총리의 민낯과 생각을 매주 국민에게 노출하는 장치다. 미국 대통령이 매주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지 않으면 언론은 대통령이 이상해졌다는 기사를 쏟아낸다. 국민이 권리 위에 잠을 자면 누군가 그 권력을 빼먹는다. 국민이 분노하면 누군가 그 분노를 이용해 이익을 누린다. 그래서 정치 선진국일수록 문을 열어젖히고 리더를 불러내는 시스템을 갖춘다. 폐쇄적 환경은 문고리가 살기 좋은 환경이다. 부정부패·비선실세 없는 정치는 국민의 권리다. 문을 방치하면 문고리는 또 생긴다.

▲  2013년 1월 1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새해 첫 일정으로 국립현충원을 찾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Flickr

26일 전국이 영하권에 접어든단다. 5일 12일 19일에 이어 26일에도 촛불은 탄다. 청와대로 가는 길은 그날도 막혀 있을까. 그래도 광화문에 촛불 든 시민은 모인다. 시민들 틈에 대권주자들도 끼어 앉을 것이다. 차벽 너머 청와대 앞에서 홀로 촛불 들 패기도, 문고리가 아닌 문짝 자체를 뜯어내 버리겠다는 의지도 안 보인다. 그런 대권후보들 중 몇 명이 1년 뒤 이날을 훈장 삼아 표를 요구할 게 틀림없다. 26일 날씨는 흐릴까. 정국 기상도는 흐리멍텅이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고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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