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촛불집회

▲ 민수아 기자

“수능이 걱정되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라가 더 걱정”이라고 대답한 고3 학생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묻어난다. 집회에 참여하지 못한 변명으로 ‘먹고사니즘’조차 댈 수 없는 내게 부끄러움을 안겨준 한마디다. 죄책감 탓에 실시간 집회 현장을 보여주는 방송 화면을 닫을 수가 없었다.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다. 화면 속의 인파와 불빛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켜볼 드라마적 가치가 충분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촛불의 일사불란한 파도타기는 ‘가슴 벅차다’라는 말의 예문으로 쓰이기에 차고 넘쳤다.

▲ 11월 12일 민중총궐기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시위로 기록되었다. ⓒ Flickr

스펙터클(spectacle)은 쇼를 의미하는 라틴어 spectaculum(스펙타쿨룸)에서 온 프랑스어인데, 14세기 이후 ‘특별히 준비되고 마련된 전시’를 의미하는 영어로 쓰인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외양 자체로 볼 만한 이벤트, '새로운 볼거리'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 개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댔다. 그는 이미지에만 매혹돼 진정한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꼬집었다.

촛불집회도 스펙터클이다. 하지만, 11월 촛불집회는 전혀 다른 개념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자극이 TV 앞의 시청자까지 끌어당겼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저렇게 많구나.’ 가장 확실한 감각기관인 눈을 통해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 사실에 자신감을 느낀다. 기 드보르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대인을 지적했지만, 11월의 촛불집회 스펙터클은 ‘공감’을 끌어낸다.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소통과정을 현대인에게서 끄집어냈다.

파리의 길은 19세기 오스만(Haussmann) 남작 주도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파리의 오스만화’ 이후 파리 시민들은 도시 곳곳을 구경하는 ‘대로 문화(boulevard culture)’를 즐겼다. 구경에 바빴던 파리 시민은 두 부류로 나뉜다. 신기한 광경을 얼빠진 듯 바라보는 ‘바도(badaud)’와 군중 속에서 거리를 거닐며 도시 풍경을 관찰하고 꿰뚫어 보던 산책자, ‘플라뇌르(flâneur)’다. 11월 촛불집회 스펙터클에 구경꾼 바도는 없고, 고뇌하며 실천하는 플라뇌르의 공감으로 가득 찼다.

▲ 미술비평가 샤를 보들레르는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도심의 구경꾼을 '플라뇌르(flâneur)'라고 불렀다. ⓒ Flickr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11월 촛불집회에서 청와대로 행진한 시민들은 무엇을 참지 못해 광화문 광장에 나선 것일까? 주권을 빼앗긴 분노, 제도권 정치에 대한 배신감… 11월 12일 ‘플라뇌르’의 가슴에는 집안에만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드는 시대정신이 살아 숨 쉰다. 미디어의 스펙터클을 통해 양산되는 광화문 플라뇌르. 그들은 사회학 이론마저 바꿔가며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써나간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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