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군대

▲ 김평화 기자

고등학교 2학년 때 1박 2일로 해병대 캠프를 다녀왔다. ‘귀신도 잡는다’는 명성에 걸맞게 캠프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다, 나, 까’로만 이뤄지는 대화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많이 먹었다.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친구 어머니께서 집까지 태워주시는 길에 “몸은 괜찮니?”라는 질문을 건넸다. 평소 같으면 “괜찮아요”라고 대답했겠지만, 어느새 군대 말투가 익숙해져 나도 모르게 “괜찮습니다”라는 딱딱한 말투가 나왔다. ‘하루만 다녀와도 이러는데 2년간 다녀오면 군대문화에 얼마나….’

권인숙은 <대한민국은 군대다>에서 군대문화가 낳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끄집어낸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특수성 속에서 징병제가 국가, 집단 중심의 사회화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뒷배라는 지적이다. 반세기가 넘는 징병제 속에서 국민 절반, 남성 다수는 군대문화에 2~3년간 길들여졌다. 상명하복의 일방적 소통을 익혔으며, 권력에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 불합리하더라도 상부의 명령이라면 입을 닫았다. 개인을 지우고 다수, 집단, 국가만을 그려나갔다. 이 모든 일에는 북한이라는 주적이 명확했기에 어떠한 의문도 필요치 않았다.

올해 4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들에게 ‘조직 내 군대문화가 있느냐’고 묻자 설문자의 약 71%가 ‘그렇다’는 답을 냈다. ‘어떨 때 군대문화를 체감하게 되는지’를 물은 질문에는 응답자의 15%가 ‘자신의 의견조차 내지 못하는 억압적인 분위기’에 군대문화를 느낀다고 밝혔다. 이렇다 보니 ‘군대문화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75%가 ‘부정적’이라 답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군대에서 체득한 모든 사고, 행위가 군대 밖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사회. 군대문화가 깊이 배어있기에 어느 집단, 조직을 가든 상명하복의 수직적 구조를 떨쳐내지 못한다. 특히 사내 조직문화에서 수직적 구조가 심해 관료제의 병폐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얘기다.

▲ 조직 내 최악의 군대문화를 구체적으로 물은 문항에는 22%의 응답자가 ‘상급자의 절대적인 권력행사’를 최악의 군대문화라 답했다. 이어 ‘사소한 결재에도 결재라인이 많고, 결재완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화’(16%), ‘상급자 내부 시찰 시 사무실 분위기가 달라지고 불필요한 정리를 시키는 경우’(13%), ‘칼 같이 엄격하고 타이트한 분위기’(11%) 등을 꼽았다. ⓒ 구글 이미지

최근 삼성 갤럭시 노트7 발화 사건과 관련해 삼성의 조직문화가 화두에 올랐다. 배터리 결합이 주원인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삼성의 경직된 조직문화도 한몫했다는 논지다. 애플과의 경쟁으로 시간 압박이 커진 상황에서 회사가 일방적으로 촉박한 일정을 잡아 화를 키웠다는 내부 불만도 나온다. 비단 삼성에만 국한된 일일까? 국내 최고 기업이 상명하복의 수직적 구조를 조직문화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다른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기업뿐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린다.

민주공화국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순실의 시대’ 게이트. 그 어떤 공적 조직에도 없는 비선 실세와 대통령의 야합이 주무르는 대한민국 자체가 합리적 문제제기를 허용치 않는 폐쇄적인 문화의 대명사다. ‘우주의 기운’을 받아 대통령 연설문을 고칠 때, ‘참 나쁜 사람’이라며 문화체육부를 비롯한 정부 공무원을 멋대로 자를 때, 검찰수사로 재벌을 겁준 뒤 청와대 수석이 그 재벌에 연락해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 돈 뜯을 때, 재벌 돈도 모자라 국민 혈세를 최순실과 그 관련 기업으로 몰아줄 때...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해 정부 부처, 사정기관에서 누가 문제제기를 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고려말 공민왕의 절대 신임 속에 권력을 휘두른 신돈. 최순실과 다르다. 영도첨의사사. 신돈은 조정의 공식 직함을 갖고 움직였다. 무엇보다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는 관료들의 건강한 항명이 있었다. 현대 민주공화국에서 상명하복. 위에서 그것도 공식 시스템에 없는 사람이 시켜도 눈치만 보며 이의제기조차 못 하는 공직사회. 한 기업의 문제라면 그 기업이 문 닫으면 그만이다. 국가의 정치행정문화가 그렇다면 나라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국민이 정신적 공황에 빠지는 이유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김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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