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비선

▲ 박고은 기자

폐행(嬖幸). 임금에게 아첨하여 총애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폐행은 국왕이 무능하거나 정치에 무관심할 때 기승을 부린다. 고려가 몽골 속국이 된 뒤, 꼭두각시로 전락한 왕들은 폐위의 불안 속에 하루해를 보낸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왕들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할 사람이 필요했고, 폐행이 자라날 최적의 환경이 무르익는다. 폐행이 사욕을 차리는 사이 관료사회는 무너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진다. 심지어 공민왕 때는 국왕 경호병인 자제위 젊은이들이 왕비와 정을 통하고 왕을 죽이지 않는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국왕과 사욕에 찌든 폐행 탓에 고려는 망국의 길을 걷는다. ‘폐행 정치’로 인한 고려의 몰락은 최근 비선 실세 국정농단으로 국격을 실추시킨 박근혜 정부의 한국 사회와 그대로 겹쳐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가 관여한 미르·K스포츠 재단.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전경련에 입김을 넣어 재단 기부금 모금을 주도한 의혹을 받는다. 미르재단이 관여해온 ‘코리아 에이드’ 예산은 160억원 이상 불어났다.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의 승인 1호 기업 3개 가운데 2개가 박 대통령의 친·인척 기업이다. 폐행을 위한 정치가 활개 치는 동안 국민을 위한 정치는 종적을 감춘다. ‘송파 세모녀 사건’을 계기로 도입된 긴급복지의 내년도 예산이 200억원 삭감된 것이 단적인 예다. 폐행 정치는 ‘권력의 사유화’로 이어진다. 정치가 사적 영역에 머물러 공공성을 잃으면 국민의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도 놓치며 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 폐행이 공적 영역에까지 관여해 사회자본을 주무르며 사욕을 채우는 사회는 '레스 푸블리카'가 아니다. ⓒ Pixabay

미국의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국가의 경쟁력은 그 사회가 지닌 신뢰 수준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신뢰가 부족한 사회는 책임감, 의무이행 등 사회협력을 위한 가치가 부족하기 때문에 창조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어렵다. 선진국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OECD 자료에 따르면 스위스,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등의 정부 신뢰도는 70%에 달해 평균보다 훨씬 높다. 모두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달러를 오르내리는 최상의 복지국가들이다. 반면 유럽의 빈국으로 꼽히는 슬로베니아, 포르투갈, 폴란드는 어떨까. 정부 신뢰도는 평균인 43%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친다. 이번 주 발표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도를 보자. 17.5%로 재임 이후 최저치를 연일 경신중이다. 박근혜 대통령 개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야 무슨 대세랴마는 정부와 국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오는 결과가 두렵다.

공화국(republic)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공공의 소유물을 뜻한다. 국민 전체가 주요 사회자본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나라가 레스 푸블리카다. ‘대통령과 가깝다’는 폐행이 공적 영역에까지 관여해 사회자본을 주무르며 사욕을 채우는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레스 푸블리카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소유물을 의미하는 ‘레스 프리바타’(res privata)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왕국에 다름 아니다. 국민이 아닌 폐행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를 믿고 따를 국민은 없다. 고대 아테네 직접 민주정치와 로마 레스 푸블리카에서 가장 중요시한 부분이 정치의 공공성이다. 권력 사유화를 막기 위해 공직의 임기를 두고 연임을 막았다. 정책 결정은 민회의 시민 손에 맡겼다. 왕정이나 참주 정치에서 권력의 사유화가 가져오는 폐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2천 5백년 전 고대 사회에도 정치의 생명은 공공성이었는데, 하물며 21세기에... 근-실 게이트로 국민을 절망시키는 정치의 사유화는 한낮의 어둑서니처럼 낯설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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