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보보담’ 익산·부여 백제유적지 답사기 (동영상 포함)

<보보담>은 한국의 인문 풍경을 담고 글로 풀어내는 잡지다. LS그룹의 후원을 받는 LS네트웍스에서 발간하기 때문에 구독신청자에게 무료로 배송된다. <보보담> 편집주간이자 LS그룹 구자열 회장의 뜻이 있기에 가능하다. <보보담> 이지누 편집장은 그를 ‘독특한 회장’이라고 소개한다. 

▲ <보보담> 이지누 편집장이 이번 답사의 인솔을 맡았다. ⓒ 박상연

백제가 남긴 유적지는 적막하다. 안내표지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대부분 넓은 공터와 산자락뿐이다. “나라가 망하니 산과 강물만 남았네” 두보의 술회가 눈 앞에 펼쳐진다. ‘승리자’ 신라가 남긴 찬란한 문화와 비교되어 더욱 처량해 보이는 곳.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은 <보보담>이 주최하는 익산·부여 백제유적지 답사에 다녀왔다.

무왕이 꿈꾼 백제부흥

<삼국유사>는 백제 무왕(서동)이 미륵사를 세웠다고 전한다. ‘하루는 무왕이 왕비와 용화산 사자사에 가다가 큰 못에 이른다. 무왕과 왕비는 못에서 미륵부처 세 분을 만나고 절을 올린다. 왕비는 이곳에 절을 세울 것을 청하고 무왕이 허락한다. 지명법사의 신력으로 하루 만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워 미륵사를 만든다.’

▲ 불상은 생김새를 보고 구분할 수 있는데 ‘모자’를 쓰고 있으면 미륵불이다. 정림사지 미륵불. ⓒ 박상연

백제는 관산성전투 이후 신라에게 연전연패한다. 서동으로 알려진 무왕은 신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정국을 뒤바꾸고 백제 전성기를 되찾는다. 익산은 무왕이 세운 별궁이 있던 곳으로 알려졌다. 익산 미륵사는 백제의 절이 1탑1금당인데 3탑3금당의 독특한 형식을 갖췄다. 미륵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 번 설법을 하러 내려온다는 미륵사상을 충실히 따랐다. 미륵사는 무왕 스스로 ‘구원자’가 되어 스러져 가는 백제를 일으켜 세우려는 그의 꿈이 담겨있다.

▲ 복원공사중인 서탑(좌), 동탑(우), 중앙목탑은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 ⓒ 곽호룡

공들이지 않는   빨리 무너진다

우리 민족은 탑도 나무로 만들었죠. 나무는 불에 취약해요. 그대로공든 무너진 거죠. 그래서 돌로 탑을 만들고자 거죠. 미륵사지 탑은 목탑과 석탑의 과도기에 지었어요. 목탑을 지을 때처럼 석탑도 크고 정교하게 만들려 거예요. 미륵사지 이후 석탑들은 점점 규모가 작아지죠.”

답사 인솔을 맡은 이지누 편집장의 말이다. 미륵사지 동탑은 완전히 무너져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 노태우 정부가 동탑 복원공사를 마무리했다. 정확한 고증과 컴퓨터가 동원된 과학적인 복원이었다. 하지만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적답사기>에서 사업의 결과물이 “끔찍스러운 흉물”이라고 말한다. 기계로 깎은 것이 오히려 탑의 생명을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망치와 정을 들고 사람 손으로 직접 탑을 쪼았다. 이 편집장도 동탑이 문화재 복원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 1993년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은 졸속행정의 결과물로 비판받는다. ⓒ 박상연

책에 나온 도상대로 모양은 아주 갖춰졌어요. 하지만 너무 하얘서 보기 싫어요. 미륵사지에 사진을 찍으러 왔어요. 비가 억수같이 와서 피하려고 동탑 안으로 들어갔더니 물이 발목 위까지 차는 거예요. 탑은 부처를 안에 모신 겁니다. 부처가 안에 있는데 물이 줄줄 새는 . 말이 되잖아요.”

2009년 미륵사지 서탑에서 사리병이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백제인들은 1400여년을 지탱할 만큼 물 샐 틈 없이 견고하게 탑을 만든 것이다.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만들었는데도 20년도 못 버티고 있는 현재와 대비된다.

인간적인 그러나 너무 세속적인

1915년 일제는 시멘트를 발라 무너져 가는 서탑을 보수한다. 1999년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탑 해체보수정비’를 시행한다. 2016년 현재 서탑은 2층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7년 7월을 목표로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탑은 동탑의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이 편집장은 서탑을 복원할 필요성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편집장은 정부와 지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으려고 환장한다”며 경제적 의도를 가진 문화재 복원이 지닌 문제점을 비판한다.

▲ “무너진 건 무너진 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 편집장이 복원 전 반쯤 무너진 서탑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 박상연

부여나성은 형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요. 돌담은 전체에 0.7%정도. 그런데 알지도 못한 문헌 뒤져서 세계문화유산을 받은 거예요. 받고 나니까 실체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만드는 거예요, 포크레인으로 깎아내고 돌을 얹어서. 부여나성 사진을 찍으러 낮에 갔더니 찍을 수가 없었어요. 때문에 빛이 반사돼서저게 얼마나 갈까요?”

▲ 부여 정림사지 연못과 다리. ⓒ 박상연

절에 가면 연못과 다리가 많다. 강이 없는데 다리가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이 편집장은 “물은 몸을 정화한다는 의미고, 다리는 새로운 세계를 연결해주는 상징”이라 설명한다. 내가 있는 속계(俗界)에서 부처가 있는 법계(法界)로 건너가고자 하는 것이다. 백제인들이 법계로 만들고자 했던 땅을 온통 포크레인이 헤집어 놓았다.

공사하려고 펜스를 치고 땅을 다지고 있네요. 전에 왔을 없었거든요. 이번 <보보담> 실은 사진은 다시 찍겠네요. 때마다 풍경이 달라지니까…”

사라진 공간을 메우는 서동설화

2009년 서탑에서 온전한 사리병과 함께 미륵사 창건을 기록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된다.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다.’ 서동(무왕)의 부인이 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기록이다.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와 반대된다. 

하지만 유홍준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서동의 결혼과 미륵사 창건이 시간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서동은 선화공주가 죽고 난 뒤 백제 귀족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종종 역사의 빈 공간은 이처럼 사람들의 상상으로 채워진다. 미륵사지에 복원한 탑은 위화감을 주지만,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그린 서동설화는 많은 사람들을 매혹한다. 들판에 홀로 선 백제유적이 좀 쓸쓸하면 어떤가? 사라졌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 대문과 궁궐이 사라진 자리에 나무들이 대신 그 구실을 한다. 인위적이지 않아서 더 아름답다. 가운데는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 곽호룡

 


편집 : 황두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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