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외교

▲ 민수아 기자

요즘처럼 해가 떨어지면 날씨가 제법 쌀쌀한 가을날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청바지를 어디에 둔 거냐며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다 괜한 반항심에 문을 박차고 집을 나와버렸다. 내가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찾지 못한 청바지였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중학생이었으니까. ‘저녁 먹을 때가 됐는데 엄마가 찾지 않을까? 아니다. 조금 더 버텼다가 들어가야 덜 쑥스럽겠지?’ ‘가출이라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금방 들어가는 거라면, 현관문을 꽝 닫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손발이 시려지자 한 가지 생각만 남았다. ‘일단, 집에 돌아갈 명분이 필요하다.’

2016년 9월 기준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해외 순방은 모두 33차례, 연평균 8.52회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7차례, 이명박 전 대통령이 49차례 해외순방을 다녀온 것과 비교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순방 횟수가 특히 많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쩐지 박 대통령에게서 ‘집을 비운 대통령’ 이미지를 지우기가 어렵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발표, 새누리당 공천 파동, 진경준 게이트 등 국내에 중요한 현안이 터질 때 항상 해외순방을 다녔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우연히 나쁜 방향으로만 일이 진행되는 ‘머피의 법칙’이 작용했다고 봐야 할까? 박 대통령의 조급한 외교 성과주의는 집에 들어갈 이유를 억지로 찾는 가출 청소년의 마음을 떠올려준다.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의 아롤드 티보 기자는 ‘국내에서 힘 빠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제적 이미지 관리에 나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기사는 박 대통령이 외교적 성과로 국내 정치의 난맥상을 풀어보려 한다고 짚었다. 세종연구소 연구원의 말을 인용해 ‘박근혜 대통령이 국내 정치 게임에서 힘을 잃었기 때문에 외교적 성과들을 주워 담으려 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문제의 해결 순서에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국내 정치의 난맥상을 풀려면 국내를 먼저 살피는 것이 순리다. 내치를 등한시하고 여행하듯 순방만 다닌들 진정한 외교 성과를 거둘 수 없다. 12.28 위안부 합의를 성과라고 내세우는 정부 주장에 동의할 국민은 많지 않다.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이의제기를 차단하는 합의는 이미 많은 질타를 받았다. 

▲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주인공 포그는 전 재산의 절반인 2만 파운드를 내기에 걸고, 나머지 절반인 2만 파운드를 여행 경비로 하여 떠난다. 포그는 이 긴 여로에서 사용할 모든 교통수단의 출발과 도착 시각을 기록하고 가장 짧은 시간을 미리 계산해 두었다. ⓒ 구글 이미지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주인공 포그는 전 재산의 반을 내기에 걸고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이 순방에 거는 국민이 이해할 만한 명분은 무엇일까? ‘항공사 마일리지를 충분히 적립했겠다’는 국민의 비아냥 속 대통령 해외순방. 큰 인기를 누리며 반향을 불러왔던 베른의 80일은 아니어도 8일, 아니 8시간이라도 좋으니 목적과 결과가 분명한 순방외교를 보고 싶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황두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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