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학문

▲ 박상연 기자

아는 것이 힘이다. 대학 때 숱하게 다닌 현장 답사에서 공부하지 않고 보는 유적은 돌덩어리나 금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인들은 바쁨 증후군에 시달린다”는 분석 기사를 쓰고 만족해하다가 “현대인들의 시간 빈곤은 신자유주의의 노예가 되었다는 증거”라는 한 비평가의 기사를 봤을 때 또 한 번 ‘앎’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비평가의 깊은 사유는 독자에게 ‘바쁨’ 문제의 근원을 생각해볼 여유를 건넸다. ‘앎’은 자유와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가진 힘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겉보기에 ‘앎’의 향연이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 고등학생 열 명 중 일곱(70.9%)은 대학에 들어갔다. 2015년 한 해만 13,077명이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그러나 통계청의 사회조사에 따르면 2014년 15세 이상 국민 중 학교 교육이 ‘효과 있다’고 응답한 이들(35.9%)이 ‘보통’이라고 느끼는 이들(38.2%)보다 적었다. 교육의 불평등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비영리 단체 사회발전조사기구에서 올해 133개국을 조사한 사회발전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고등교육 성취의 불평등 항목에서 80위에 머물렀다. ‘아는 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도움 되지 않고 불평등한 모습일 때 전혀 다른 차원의 부정적인 힘, ‘권력’이 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한 개인의 지위를 돈과 같은 경제 자본과 인적 요소의 사회 자본 외에 학위나 지식, 취향과 같은 문화 자본으로 가늠했다. 나아가 인간이야말로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며, 사회는 개인 간 투쟁의 장으로 봤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문화 자본은 이익을 추구하는 하나의 도구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대학 졸업장은 사회가 정해준 서열에 따라 객관적 지표, 곧 ‘스펙’이 된다. 같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유사종족이 되어 끈끈한 무리를 이룬다. ‘SKY'라는 이유로 무조건 칭송하고 버젓이 ’지방대‘라는 언어가 비하의 의미로 통용되는 학벌 순종주의 사회다.

▲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이라 전해지는 노벨상의 슬로건. “For the greatest benefit to mankind(인류 문명에 최고의 공헌)". Ⓒ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김종영 교수는 저서 《지배받는 지배자》에서 연구 중심적이고 개방적인 미국의 고등교육 환경을 노벨상 수상의 사례로 설명했다. 1930년까지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는 4명에 그쳤다. 1933년 유럽에서 정치 지형이 변화하면서부터 1944년까지 실력 좋은 인재들이 미국으로 이주했고, 미국 교육 환경의 특혜를 누렸다. 이 가운데 12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8,000여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있다. 올해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6명은 모두 미국 대학 소속에 이민자 출신이다.
 
‘SKY'와 해외명문대 출신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학문의 왕국. ‘연구’의 깃발을 내린 지 오래다. 대신 실업자를 줄이자는 명목으로 ‘취업’ ‘성장’ 구호를 뒤집어썼다. 대학 구조조정의 민낯이다. 대학생 60%가 대학을 취업을 위한 스펙용 학원으로 생각한다는 지난달 YTN의 설문조사는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에 불과하다. 노벨상의 정수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이라 전해지는 슬로건에 담겼다, “For the greatest benefit to mankind(인류 문명에 최고의 공헌)." 아는 것이 문명에의 공헌이 아니라 권력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노벨상을 바랄 수 있을까.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송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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