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노동

▲ 송승현 기자

초등학교 4학년, 아직 온라인 게임이 발달하지 않던 시절. 게임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동그랗게 반짝거리던 CD를 통해서다. 어느 날 CD를 사려고 가게를 들어갔다. 돈이 얼마 있냐는 가게 주인의 물음에 “9,000원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은 진열장이 아닌 창고로 들어가더니 아무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고, 매직으로 ‘날아라 슈퍼보드’라는 글자만 적힌 CD를 건넸다. 당시는 몰랐지만, 훗날 알게 된 CD의 정체는 ‘불법복제’였고, 내 콘텐츠는 그렇게 불법으로 첫걸음을 뗐다.

현대 공산주의 사상에 기초를 닦은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을 남겼다. 최근 큰 규모의 노조 파업이 벌써 3차례나 벌어지며 노동자 단결을 호소하고 나섰다. 금융노조, 철도노조, 화물연대... 금융노조와 철도노조는 노동의 가치가 성과에 좌지우지되는 ‘성과연봉제’ 반대를 들고 나왔다. 이는 노동의 가치가 노동 그 자체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뿌리를 둔다. 여기서 곰곰 색다른 주제에 빠져든다. 노동의 가치를 빼앗긴 정신노동자들이다. 육체노동은 그 가치에 대한 대가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바로 돌려받는다. 반면, 정신노동의 결과물인 콘텐츠는 다르다. ‘공짜병’에 걸려, 무료가 아니면 이용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불법 복제가 판치는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제값을 주고 사면 ‘바보’가 되는 사회다.

이런 풍토 탓에 게임 제작사는 게임으로 돈을 벌 수 없기에, 사행성을 부추긴다. 가수들은 음원으로는 돈을 벌 수 없어 음악 작업보다 예능프로에 나간다. 국내 노동 시장에서 이런 정신노동자들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천대받기 일쑤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셸링은 개개인의 행동이 뭉쳐 결국 사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쏠림(tipping) 이론’으로 주목받았다.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겠다는 아이들을 질타하는 현실. 그런데도 ‘포켓몬 고’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IT업계를 질타하는 사회.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그동안 스스로 평가 절하해 온 것은 아닐까.

▲ 정신노동의 산물인 콘텐츠는 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가. ⓒ Toolbox.com

올여름 ‘화이트데이’라는 게임이 큰 인기를 끌었다. 신작 게임이 아닌 플랫폼을 PC에서 모바일로 바꿨을 뿐이다. 과거 PC 패키지 게임으로 출발했던 이 게임은 ‘한국 공포게임의 지평을 넓혔다’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았다. 불법 복제로 인해 패키지가 3,000장밖에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시 기자회견장에서 제작사 대표는 “이제는 사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라는 읍소에 가까운 말을 남겼다. 이 말에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이제는 사겠습니다”라고 답하는 사회. 정신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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