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권력

▲ 민수아 기자

체스에 캐슬링(Castling)이라는 기술이 있다. 초기배치에서 중앙에 있는 킹(King)은 적의 공격을 받기 쉽다. 특히 많은 기물(器物)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초반에 킹은 체스 보드의 끝에 있는 쪽이 안전하다. 반대로 체스 보드 양 끝에 배치된 룩(Rook)은 수직 수평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기 때문에 빨리 중앙에서 활약시키는 게 좋다. 캐슬링은 킹과 룩 두 기물을 한 수(數)로 동시에 움직인다. 체스를 보다 빠르고 재미있게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다.

한 번에 두 기물을 움직이는 캐슬링을 보면 ‘정운호 게이트’로 대표되는 최근의 법조비리 사건이 떠오른다. 움직임이 자유로운 룩은 기소권과 전관예우를 등에 업은 사법부가, 룩의 이동에 따라 몸을 피하는 킹은 한국사회의 사실상 권력 1순위인 재벌이 연상된다. 사법 권력과 경제 권력의 법경(法經)유착은 쉽게 파고들 수 없는 탄탄한 수비 자세를 만들어낸다. 칼을 든 장수(將帥)가 왕을 보호하고, 왕은 자리를 피해 견제의 시선으로부터 숨는다. 부패의 사슬이 빚어내는 결정적 한 수다.

사법부의 막강한 권력은 식민 시대 신속한 탄압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 검찰의 기소독점주의, 기소편의주의와 같은 제도에 뿌리를 둔다. 형사소송법 제247조는 “검사는 형법 제51조의 사항을 참작하여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여 기소편의주의를 채택한다. 기소편의주의는 검사가 합리적으로 사건을 판단하여 기소 여부를 결정함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지만, 검사의 독선이나 정치적 영향에 좌우될 우려가 더 크다. 최근 문제가 된 사법부의 비리 사건도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기소편의주의가 원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여기에 사법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경제 권력이 개입되면 검찰 중립은 사실상 물 건너간다.

▲ 체스에는 장기의 졸(卒)에 해당하는 폰(Pawn)이 상대방의 최종 열에 도착하면 퀸(Queen), 비숍(Bishop), 나이트(Knight), 룩(Rook) 등 자신이 원하는 기물로 승격되는 프로모션(Promotion) 규칙도 있다. ⓒ Pixabay

체스에서 캐슬링은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도 많다. 킹이 상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거나, 킹이 한 번이라도 움직이면 캐슬링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장기의 졸(卒)에 해당하는 폰(Pawn)이 상대방의 최종 열에 도착하면 퀸(Queen), 비숍(Bishop), 나이트(Knight), 룩(Rook) 등 자신이 원하는 기물로 승격되는 프로모션(Promotion) 규칙도 돋보인다. 드물긴 하지만 자기 하기 나름에 따라 신분상승을 거쳐 권력을 얻는다. 봉건사회의 계급을 나타내는 체스의 기물도 권력의 제한, 신분상승 기회 같은 민주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2016년 현대 민주사회의 권력 견제와 배분의 장치가 봉건사회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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