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유혹하는 에디터2] ⑧ 돌고래의 자유는 우리에게 무엇인가(하)

▲ 고경태

제돌이는 2012년 3월 3일, 한국 신문 역사상 일간신문 1면 머리를 장식한 최초의 동물이 되었다. 엄정한 잣대를 요구하는 신문 1면 머리를 놓고 벌어진 격렬한 논란을 돌파했다. 아무리 기획 중심의 토요판이지만 ‘그깟 돌고래’ 한 마리를 어떻게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 같은 정치적 사안보다 비중 있게 취급할 수 있느냐는 내부의 문제 제기를 힘겹게 넘어섰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 고집과 노력이 아깝지 않으려면, 보도가 여론의 화살에 업혀 표적을 뚫어야 했다. 1면에 카피로 뽑았던 ‘제돌이의 운명’에 변화가 생겨야 했다. 그 변화란 곧 제주 바다로의 귀향을 의미했다. 서울대공원 쇼공연장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며 어린이들의 환호성을 받던 제돌이는 멸종위기 국제보호종인 남방큰돌고래였다. 하루 수십km 바다를 헤엄치던 야성을 포기하고 길이 35m, 폭 7~9m, 깊이 3m의 좁고 얕은 수족관에서 ‘감금 생활’을 하던 중에 자유의 기회가 온 것이다.

당시 해양경찰청은 남방큰돌고래를 불법포획해 거래한 제주의 돌고래공연업체 퍼시픽랜드 대표 등을 적발해 수사하는 중이었다. 해양경찰청의 수사는 이들에 대한 검찰의 기소로 이어졌고, 삼팔이·춘삼이 등 6마리가 몰수대상으로 지목됐다. 제주지방법원에서 판결이 진행 중이었다. 이 역사적인 ‘돌고래 야생 방사 재판’에 환경운동단체들의 시선이 쏠렸다. 퍼시픽랜드에서 바다사자와 맞교환돼 서울대공원으로 팔려간 제돌이는 정당거래로 인정돼 몰수대상에서 빠졌지만, 환경단체들은 “불법포획된 모든 개체가 돌고래쇼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토요판은 가장 어리고 이름이 친근한 제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돌고래들의 처지를 알렸다. 제주도에서 왔다 하여 ‘제돌이’였다. 조련사들끼리 붙여 불렀지, 세상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제돌이 보도가 돌고래들에게 즉각 자유를 선사하는 결과로 나아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동물권 이슈는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박원순의 ‘폭탄’

제돌이 기사의 탄생은 ‘생명’의 탄생과 궤를 같이했다. 여기서 ‘생명’이란 <한겨레> 토요판이 2012년 1월 28일치 첫 호부터 매주 내보낸 고정 지면 이름이다. 한 면을 털어 오로지 동물에 관해서만 다뤘다. 그렇다고 ‘동물의 왕국’ 류의 지면은 전혀 아니었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었다. 공장식 양계장, 소·돼지 도축과정, 반려동물 키우기 등에 관해 기자들이 현장 르포를 쓰거나 전문가 기고를 받았다. 한국 언론이 끈질긴 관심을 갖고 접근해 본 적이 없는 분야였다. 1면을 비롯해 3, 4, 5면까지 펼친 제돌이 커버스토리는 그러한 생명 지면의 특집판이었다.

일등공신은 당시 사회부에서 환경을 담당하던 후배 남종영 기자였다. <북극곰은 걷고 싶다>, <고래의 노래> 등 다수의 환경 책을 쓴 남종영 기자의 전문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생명’ 기획의 첫걸음은 물론 제돌이 보도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사회부장이던 김의겸 선배는 남종영 기자가 토요판 생명면 취재와 기사작성을 할 수 있는 짬을 내도록 배려해주었다. 동물권의 미래 가치에 공감해준 덕분이었다. (남종영 기자는 그해 5월 사회부에서 토요판 팀으로 발령 났다).

그렇다고 ‘생명 콘텐츠’가 현안 대접을 받는 건 아니었다. 돌고래들이 품격 있는 환경기사 소재라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었지만, 뉴스 현안으로서 확장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힘들었다. 한국사회 동물복지의 현주소를 고발하는 색다른 일회성 기사로 그칠 공산이 컸다. 제돌이는 잠시 언론의 주목을 받은 뒤 곧바로 퇴장하고 말 것처럼 보였다.

세상일은 모른다. 예측하지 못한 ‘대사건’이 벌어졌다. 제돌이 커버스토리가 나간 지 10일째 되던 2012년 3월 12일 아침, 박원순 시장은 과천 서울대공원 돌고래 공연장 앞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낸다는 ‘폭탄 기자회견’이었다.

▲ 불법 포획된 국제보호종 남방큰돌고래를 돌려보내라는 동물보호단체의 요구가 잇따르면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제돌이의 야생 방류를 결정했다. ⓒ SBS <뉴스> 갈무리

과천 서울대공원은 서울시 산하기관이다. 서울대공원 운영을 책임지는 자치단체장으로서 박원순 시장은 말했다. “제돌이가 한라산과 구럼비가 있는 제주 앞바다에서 마음 놓고 헤엄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동물과 사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검토하고 새롭게 설정하는 문제입니다.” 이날 서울시가 발표한 입장은 세 가지였다. 첫째, 돌고래쇼를 잠정 중단한다, 둘째 여론 수렴 절차를 거쳐 돌고래쇼 지속 여부를 결정한다. 셋째, 제돌이는 1년의 야생 방사 훈련을 거쳐 바다로 되돌려 보낸다. 간단히 말해, 돌고래쇼 중단, 제돌이 귀향!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박원순 시장은 동물권에 관한 선각자였다. 1994년 대구지방변호사회가 펴낸 <형평과 정의> 9집에 ‘동물권의 전개와 한국인의 동물인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은 외국의 동물권 논의와 이에 관련한 국내 움직임을 다뤘다. 서론에서 그는 하와이대 해양생물학연구소에 실험용으로 들어왔다가 야생 방사된 돌고래를 예로 들며 이렇게 썼다.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는가? 이 질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웃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개나 고양이에게 자신의 모든 사재를 상속시키거나 주인과 함께 나란히 묻히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단순히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동물권의 확립을 위하여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실은 결코 이 문제가 동물애호가의 헛소리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1990년대는 국내에 ‘동물복지’라는 말이 생소하던 때였다. 박원순 시장은 2006년부터 서울시장이 되기 전인 2011년까지 동물복지 운동단체 카라의 첫 명예이사를 맡아 활동한 이력도 있다. <한겨레> 토요판의 제돌이 기사가 나가자마자 야생 방사 정책으로 화답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조선일보, 제돌이에 빙의되다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지 않았다. 찬성파만 있었다면 싱거웠으리라. 반기를 든 세력이 나타났다. 총공세를 펼쳤다. 덕분에 논쟁이 벌어졌고 판이 커졌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앞에 선 보수언론이었다. 기자회견 직후인 3월 13일과 14일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사와 사설의 제목들을 보자. “박원순의 ‘돌고래 정치’” (조선, 3월 13일치 1면), “3년 전 불법포획된 제돌이…이젠 정치적으로 이용되나” “무리 떠난 지 오래돼 동료에 공격당할 수도” (조선, 3월 13일치 11면), “박원순 ‘과천 돌고래, 구럼비 앞바다에 풀어주겠다’” “이송-야생 적응 비용 8억 넘어” (동아, 3월 13일치 17면),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내 죽으면 어떡할 건가.” (동아, 3월 14일치 31면)

그들은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박원순 시장은 돌고래 문제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과 얽혀있는 구럼비 바위와 연계시켜 정치화한다는 것. 둘째, 서울시가 제돌이 한 마리를 야생으로 돌려보내는데 책정한 비용 8억7000만 원은 혈세 낭비라는 것. 셋째, 제돌이 야생방사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

사실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명료했다. 보수언론 입장에선, 그냥 박원순 시장이 꼴 보기 싫은 거였다. 제돌이 기사를 쓴 남종영 기자의 반박 글에 따르면, 야생 방사 비용 8억7000만 원은 (한 언론의 비판처럼) 저소득층 486가구의 한 달 최저생계비에 맞먹기도 했지만, 서울 강남의 30평대 아파트 한 채 값밖에 되지 않은 돈이었다. 또한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내 죽으면 어떡할 건가’라고 비판하면서 ‘2년 이상 감금된 돌고래의 야생방사는 성공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이는 다양한 연구사례들을 검토하지 않은 결과였다.

과학적 주장과는 거리가 먼 무리한 이야기가 판을 쳤다. 3월 14일치 <조선일보> 데스크칼럼이 대표적이다. 필자는 제돌이의 영혼에 빙의라도 된 듯 이렇게 썼다. “차라리 지금처럼 서울대공원에 그냥 놔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돌고래는 애초부터 정치인들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친구였다. 돌고래도 특정 집단을 위한 정치쇼에 동원되는 쪽보다는 갇힌 상태일지언정 어린이들을 위한 쇼를 계속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한겨레 안에서 제돌이가 불법사찰 같은 정치적 현안과 1면 머리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면, 한겨레 1면 머리에 등장한 뒤의 제돌이는 정치적 현안이 되었다. 제돌이는 ‘정치적 동물’로 급부상했다. 보수언론의 맹공 덕분에 유명해졌다. 다른 신문과 방송들도 너나없이 제돌이 방사 논란을 소개하더니 나중에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섭외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한겨레> 안에서 기사 경중을 둘러싸고 논쟁의 대상이 되던 그 제돌이가 아니었다. 제돌이는 좁은 토요판 지면의 가두리를 빠져나와 한국사회 여론의 바다를 헤엄치며 모두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 최고의 동물 스타가 탄생했다.

박원순 시장은 노련했다. ‘돌고래 정치’라는 논란을 민-관 협치로 뚫었다. 서울대공원의 돌고래쇼를 일방적으로 중단하지 않고 여론조사와 소셜미디어 의견조사, 시민 대표로 구성한 100인 위원회를 통해 결정하도록 했다. 야생 방사의 전권은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돌이 방류를 위한 시민위원회’에 맡겼다. 보수언론의 공격은 얼마 안 가 힘을 잃었다. 제돌이는 순조롭게 야생 방사 일정을 밟았다.

비극과 해피엔드

2013년 7월 20일이었다. 그날 치 <한겨레> 토요판을 기억한다. 1년 4개월 만에 제돌이가 다시 토요판 1면 커버스토리에 오르는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2012년 3월 3일치 토요판의 제돌이가 자신을 감금한 서울대공원 공연장에서 훌라후프를 돌렸다면, 이날의 제돌이는 제주 앞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나는 1면 제목을 간명하게 뽑았다. ‘자유.’ 그다음 부제는 한 줄이었다. ‘바다의 제돌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1면 사진설명은 이렇게 쓰였다. “18일 오후 4시 20~30분께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목지곶 해안 인근 가두리 안에 있던 제돌이는 부리를 내밀고 서서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곧 바다로 빠져나갔다. 허탈한 이별 뒤 고무보트를 타고 제돌이와 춘삼이를 찾아 나섰다. 서쪽으로 내달린 지 40여 분. 김녕항에서 서북방으로 약 2.5km 떨어져 있는 다리도 인근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제돌이를 발견했다.”

▲ 2013년 7월 20일치 <한겨레> 토요판 1면(왼쪽). 2012년 3월 3일치 토요판 1면(오른쪽)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며 쇼를 하던 제돌이는 1년 4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드넓은 바다를 헤엄쳤다. ⓒ 한겨레

2012년 3월부터 돌고래쇼를 그만둔 제돌이는 2013년 5월 고향인 제주로 왔다. 바다로 나가기 전 성산항 가두리에서 야생적응훈련을 하기로 했다. 제주 퍼시픽랜드 소속 돌고래로, 제주지방법원을 거쳐 대법원에 의해 야생 방사가 확정됐던 춘삼이와 삼팔이는 한 달 전 이곳에 와 있었다. 두 달간의 훈련을 마친 제돌이는 2013년 7월 18일, 마지막으로 이동한 김녕리의 목지곶 해안 가두리에서 드디어 춘삼이와 함께 찢긴 그물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 바다로 갔다. (함께 있던 삼팔이는 한 달 전 가두리 탈출) 이들의 귀향을 축하하기 위해 ‘제돌이 야생방류를 위한 시민위원회’ 위원들과 취재진 70여 명이 현장을 지켰다. <한겨레> 토요판도 1년 전 첫 보도를 했던 남종영 최우리 기자와 강재훈 선임기자를 제주에 보냈다. 제돌이를 비롯한 세 마리의 돌고래와 이별의 의식을 치른 김녕리에는 기념 표지석이 섰다. 돌에는 이런 글이 새겨졌다. “제돌이의 꿈은 바다였습니다.”

꿈. 그렇다. 제돌이의 꿈은 바다였다. <조선일보> 칼럼 내용처럼 설마 ‘어린이들과 함께 쇼를 하는 것’이 제돌이의 꿈이었을까. <한겨레> 토요판의 제돌이 커버스토리는 ‘꿈’을 실현해주었다. 나는 토요판과 관련해 미디어 강의를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4년여간의 토요판 에디터 재직 기간중 최고의 보도를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제돌이다”라고 말해왔다. 물론 빛나는 또 다른 특종과 기획이 있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정수장학회 최필립 이사장과 문화방송 이진숙 기획홍보본부장이 MBC와 부산일보의 지분처리 및 활용계획을 밀실 합의하고 대선용 선심성 사업을 기획했다는 최성진 기자의 보도는 대특종이었다. 그해 민주언론상을 포함한 언론계 상을 휩쓸었다. 2013년 8~9월 박유리 기자가 쓴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은 ‘스토리페이퍼’로서의 신문의 잠재력을 선보이며 관훈언론상 저널리즘 혁신부문을 수상했다. 두 보도는 회사 안팎의 갈채와 격찬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제돌이 보도는 언론계 안에서 변변한 상을 타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돌이 보도를 먼저 꼽는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워, 오래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비극적 처지를 비판하고 폭로한 이 기사는, 자유를 쟁취하는 해피엔드로 승화되었다. 신문기사로 출발했지만, 동화와 전설의 요건을 갖춘 고유한 서사가 되어 100년 뒤 혹은 1000년 뒤에도 전승되리라는 예감을 한다.

해피엔드의 주인공, 제돌이는 2016년 10월 현재에도 잘 있다. 고래연구자들이 수시로 확인한 뒤 보고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암놈이었던 삼팔이와 춘삼이는 각각 2016년 4월과 8월에 새끼를 낳았다.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내 죽으면 어떡할 건가’라는 보수언론의 걱정은 기우였다.

동물은 기계인가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제돌이와 관련한 최초의 쟁점은 한겨레 안에서 동물기사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한가한 뉴스 아니냐는 비판이 단단히 날을 세웠다. 제돌이가 꿈을 실현한 지금도 유효한 지적이다. 돌고래 몇 마리의 해피엔드가 인간들의 삶에 어떤 보탬을 주느냐는 것이다. 동물권과 인권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 2013년 7월 제돌이가 바다로 갈 때 신체적 조건과 방사 비용 등의 문제로 함께 가지 못하고 제주의 수족관업체에서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던 돌고래 태산이와 복순이도 동물복지단체인 ‘동물자유연대’의 노력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움직임을 보도한 <한겨레> 토요판 2015년 2월 28일치 1면. ⓒ 한겨레

<한겨레>가 1면에 제돌이를 실은 건 동물권과 인권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근대는 이성의 시대였다. 인간만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 중심적 생각은 동물과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동물은 기계다”라고 정의했다. 영혼 없는 기계를 대우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공장식 축산시스템과 동물원과 동물쇼다. 박원순 시장은 1994년 논문의 결론에서 “동물에 대한 잔혹한 대우는 같은 생명인 인간에 대한 동일한 인식으로 연결되게 마련이다”라고 썼다. 동물을 기계로 취급하는 사회는 인간도 기계로 취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제돌이 보도는 ‘그깟 돌고래’의 ‘잉여 읽을거리’가 아니라 인권 존중으로 확장하는 기초적 동물권에 대한 의미심장한 담론이었다. 제돌이를 바다로 탈출시킴으로써 기어코 성공한 드라마를 완성해냈다. 제돌이는 동물과 인간을 기계로 여기는 세상에 구멍을 낸 동물이 되었다. 또 어떤 동물이 구멍을 낼 것인가. 또 어떤 언론이 이런 보도에 앞장설 것인가. 또 어떤 언론이 기를 쓰고 반대할 것인가. 비극 속에서도, 논쟁과 해피엔드는 계속되어야 한다.

<끝>

*참고: <프리 제돌: 남방큰돌고래 야생방사의 생명정치>(남종영, 근간)


고경태. 한겨레 편집국 신문부문장. <유혹하는 에디터>에서 <1968년 2월 12일>, <한마을 이야기-퐁니·퐁넛>까지 5권의 책을 썼다. 2009년에 낸 <유혹하는 에디터>가 편집자를 다뤘다면, 2016년의 이 연재물은 편집장 이야기다. <한겨레21> 편집장, <씨네21> 편집장, esc 팀장,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문화스포츠 에디터, 토요판 에디터 시절의 에피소드로 버무릴 예정이다. 격주 연재.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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