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추모객들 발길 이어지는 백남기 장례식장

지난 27일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안과 밖은 서로 다른 성격의 물줄기로 휘감겼다. 밖에선 가을을 재촉하는 빗줄기, 안에선 고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탄의 물줄기가 조문객들의 가슴을 슬픔과 애도에서 분노로 적셨다. 추모객들로 붐빌수록 그래서 더 적막감이 깊었다. 백남기 농민이 우리 곁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추모 현장에 다녀왔다.

▲ 서울 장례식장 병원에 있는 백남기 농민의 분향실. ⓒ 송승현

추모객으로 붐비는 속에도 적막함이 감도는 이유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조문 안내 전광판에는 단 한 명의 고인 이름만 보였다. ‘백남기’. 그러나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추모하는 시민, 조문객을 맞는 유가족, 입구에 진을 친 기자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공권력에 맞서고자 모인 단체... 인산인해 속에서도 빈소엔 적막함과 공허함이 감돌았다. 무엇인가 중요한 게 빠져 보였다.

▲ 백남기 농민을 찾은 추모객들의 행렬. ⓒ 송승현

예부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영가(靈駕)라 부른다. 영혼은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몸에서 나와 움직인다는 생각에 수레를 뜻하는 가(駕)를 붙였다. 장례식을 3일 동안 치르는 데는 영가가 자기 몸으로 들어와 혹시 되살아나길 바라는 열망이 담겼다. 장례식장이 공허해 보인 건 왜일까? 지난 해 11월 광화문에서 물대포에 떠난 농민 백남기의 영혼이 돌아올 기미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가 쓰러진 날부터 317일 동안 이미 풀어줬어야 할 그의 한(恨)이 풀리지 않아, 아직도 그의 영가가 광화문에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 출입구 한쪽에 모여 투쟁 준비 중인 갑을오토텍 노조. ⓒ 송승현

“두 번째 국가 폭력에서 백남기의 영가를 편히 보내드려야”

백남기 농민이 떠난 뒤 천여 명의 경찰병력과 백남기농민 대책위가 대치중이다. 돌발 상황을 대비한 기자들은 밤샘 탓인지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한쪽에 돗자리를 펴고 노트북을 두드려 댄다. 빈소와 출입구엔 각종 TV방송 카메라가 빈소의 풍경을 잡아낸다. 옹기종기 모여 고인을 추모하는 갑을 오토텍의 한 노조원은 “백남기 농민이 국가폭력에 의해 돌아가셨는데, 경찰이 부검을 시도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시도중이다.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빈소를 지키고 있다. 죽음 이후 두 번째 국가폭력을 저지해야만 편히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빈소에 모인 이유를 결연히 밝혔다. 

▲ 송수압기 밑에 있는 준수사항처럼, 물대포 규정을 지켰다면 이런 문구도 필요 없지 않았을까. ⓒ 송승현

“시민사회 외침에 국가는 반드시 반성으로 응답해야”

빈소에서는 미사도 열렸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지방(紙榜)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조문객을 맞는다. 김배다(57) 수녀는 “백남기 농민의 이별 소식을 듣고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어떻게 보내드려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어 미사에 왔다”면서 미사가 끝났는데도 떠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힘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성이 없는 정부가 한 번이라도 사죄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 머물고 있다”고 말끝을 흐린다.

빈소 한쪽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특검실시’ 촉구 서명 코너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 둘이 펜을 잡았다. 수줍게 서명을 하고 쪼르르 달려간 그녀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딸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며 “국가의 횡포에 공감하는 딸들이 대견하고 고맙다”면서 눈시울을 적신다. 서명에 동참하고 장례식장을 나서는 시민들의 마음은 모두 한결 같아 보였다. 

신주철(25)씨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 뒤에 보여주는 정부의 태도는 국가폭력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한지를 보여 준다”며 “추모 행렬과 집회에서 보여주는 시민의 외침에 국가는 반드시 응답을 해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 장례식 접견실에 놓여 있는 근조 리본. ⓒ 송승현

편집 : 황두현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