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읽고 나누는’ 고정식 연세대 철학과 교수

“누가 나를 평가할 때 다른 건 다 인정할 수 있지만, 학생을 아끼는 점에서 (1등이 아니라) 2등을 하라고 하라면 서러울 것 같아요. 나는 진심으로 내 강의에 들어온 학생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한 강의 수강생 100여 명의 이름과 얼굴을 다 기억하는 교수, 학생들이 어떤 문제로 찾아가든 자기 일처럼 진지하게 조언하는 스승, 정원 초과로 수강신청 못 한 학생을 위해 학과 사무실까지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선생님. 모두 연세대 고정식(63·철학과) 교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논문 실적으로 교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대학 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 관심을 쏟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는 기꺼이 시간을 내주는 ‘멘토(조언자)’로 유명하다. 지난 6월 2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교내 청송대 숲에서 그를 만나고, 지난 3일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 연세대 교내 청송대 숲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고정식 교수. ⓒ 김평화

학생들 만나는 시간이 ‘설렌다’는 교수

그는 “학생은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귀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현재 상태론 미흡한 점이 많지만 어떻게 고민하고 공부하느냐에 따라 사회에 크게 기여할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모두가 귀한 존재라는 설명이다.

학생들에게 애정이 깊다 보니 그들이 고민을 들고 찾아오는 일을 반긴다. 수업시간에 ‘언제든 찾아오라’고 광고도 한다. 그래서 상담을 청하는 학생도 많은데, 그는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쪼개서 어떻게든 다 만나려 노력한다. 그는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설렌다’고 한다. 선생과 심리적 거리를 느낄 텐데도 찾아오는 학생들이 고맙고, 그들을 마주하는 매시간이 즐겁다고 고백한다.

“학생은 잠깐만 만나고 가려 하는데 오히려 제가 오래 잡아둬서 학생이 당황하는 경우도 있어요. 늘 분위기 봐 가면서 해야지 하면서도 이런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웃음) 그만큼 제가 그 시간을 즐긴다는 뜻이죠.”

학생들이 털어놓는 고민은 정신적 문제나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 많은 편이다. 친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고민을 털어놓는 학생들이 많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거리감도 있고 나이 차도 크지만, 그는 최대한 학생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단 한 명의 고민도 사소하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교과서 같은 답은 제쳐놓고 '나라면 어떻게 할까'하는 관점에서 답을 해준다고 한다. 또 자신의 조언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진솔하게 대화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듣고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함께 고민한다는 고정식 교수. ⓒ 김평화

“(내 판단이 명확하진 않더라도)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얘기하는 거죠. 교과서적인 답에서 벗어나 진솔하게 답을 해주다 보니 학생이 거기서 직접적인 답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답을 얻진 못하더라도 상당한 위로를 받는다고 해요.”

그는 암울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던 학생이 얘기를 나누며 점차 우울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철학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끊임없이 읽는 것이 인생 문제를 상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철학에 입문하도록 만든 한 권의 책

그가 많고 많은 전공 중 철학을 선택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읽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꽤 잘하긴 했지만 월등하진 않았다는 그는 입시만을 위한 공부가 지루해지던 차에 우연히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를 읽게 됐다. 이 책을 통해 철학에 눈을 뜬 뒤 관련 서적으로 독서의 범위를 넓혀갔다.

당시에는 공부 잘하는 학생 대다수가 법대를 선택하는 분위기였다. 그 역시 법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누군가가 원하는 답을 위해 외우는 공부를 하긴 싫었다. 연세대 철학과에 지원한 그는 “왜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는 것을 공부하고 싶다”고 답했다.

“철학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는 학문인 것 같았어요. 입시 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지금까지 공부해보니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던지면 파고들어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질문을 던지는 게 철학이기 때문이죠.”

▲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 철학 입문서 고전으로 꼽힌다. ⓒ 봄날의책

독서는 삶의 원동력, 각자의 ‘지적 아령’ 찾아야

대학 시절 그는 지적 호기심이 넘쳐 철학 전공서 외에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대학교 1, 2학년 때 한 해 평균 45권 정도의 책을 읽었는데, 그때의 독서량이 지금도 이어져 9일에 한 권꼴로 책을 뗀다고 한다. ‘모두 다 읽고 싶고 알고 싶어서’ 물리학부터 뇌신경과학, 경제학, 현대 성격심리학까지 약 3,500권의 책을 쌓아놓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집을 못 지나치는 것처럼 저에겐 서점을 지나치는 일이 무척 어렵습니다. 시간 여유만 생기면 서점에 들르게 되죠. 그러다 보니 약속 같은 걸 해도 아예 서점에 들르지 않게 하느라고 일부러 약속 시각에 딱 맞춰 나오는 게 버릇이 됐을 정도예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인류의 출현부터 인간의 역사 전반을 다룬 책으로 워낙 재밌어서 원서까지 샀다. 인문사회과학 통틀어서 딱 한 권의 책만 추천한다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꼽고 싶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논어>(공자)와 <소설 알렉산드리아>(이병주), <회복탄력성>(김주환), <정의론>(존 롤즈), <만들어진 신>(리차드 도킨슨) 등을 ‘깨우침을 안겨준 책’으로 꼽았다.

▲ 고정식 교수가 추천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 김영사

그의 책 읽기 방식은 독특한 점이 있다. 한 번에 한 권의 책을 정독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책 여러 권을 동시에 조금씩 읽는다. 소설과 전공 서적, 교양서를 함께 읽는 식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어도 단시간에 읽어버리면 내용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게 ‘동시다발’ 독서를 하는 이유다. 고 교수는 또 독서를 할 때 각자의 역량에 따라 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아령이론’도 주창한다. 운동하기에 적절한 아령의 무게가 사람에 따라 다른 것처럼, 이미 독서량이 상당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선택하는 책은 다른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평소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이 무턱대고 어려운 책을 붙잡는 것보다, 읽기 쉬운 책부터 시작해서 점차 독해력을 높여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 교수는 이 아령이론을 통해 ‘술자리를 좋아하고 독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학교 사무직원을 일 년 만에 80여 권 읽게 한 경험도 있다. 방법은 간단했다. 자신이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기 위해 어려운 책을 추천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눈높이를 고려해서 신중하게 골라주는 것이었다.

“맨 처음 책을 소개해줬더니 금방 읽고 왔더라고요. 그래서 또 다음 책을 추천해줬죠. 그러더니 책을 계속 쭉쭉 읽어나가더라고요. 내가 읽어라 재촉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신이 나서 읽은 거죠. 나중에 한 번 헤아려보라고 했더니 83권을 1년간 읽었다고.... 도움을 받아 걸음마를 떼게 되니 곧 스스로가 가진 힘으로 길을 찾아간 것이죠.”

▲ 자신의 수준에 맞는 책을 찾아 지속적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flickr

신도 누릴 수 없는 인간의 특권, ‘성장’

그의 독서 예찬은 계속된다. 나이가 똑같이 30세인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두 사람의 나이는 정말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경험을 하면서 서른이 되었느냐에 따라 한 사람은 이미 50세와 같은 깊이를 지녔을 수도 있다. 책은 간접경험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게 고 교수의 지론이다.

“신이 누릴 수 없는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게 하나 있어요. 바로 성장하는 것. 신은 완벽하므로 발전할 수 없지만, 인간은 미숙한 상태에서 점차 나아갈 수 있는 거죠. 성장, 발전, 개선, 진보의 개념들이 모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는 책이 성장의 발판이 된다고 말한다. 인간다움이 기존의 자신을 뛰어넘는 발전에 있다고 했을 때, 그에게 있어서 인간다움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책이다. 책을 읽고 나날이 성장한다는 그는 그 경험을 학생들과 나누면서 선순환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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