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성희 기자

▲ 박성희 기자

맞벌이 부모였기에 나와 남동생은 할머니 손에 자랐다. 몸이 고달픈 탓인지 할머니는 내가 부엌에 들어가고 남동생도 돌볼 것을 기대했다. 그럴 때마다 하신 말은 “해 버릇해야 돼”였다. 내 방 청소는 물론 설거지도 내 몫이었다. 손을 데어가며 교복 셔츠도 다려 입었다.

어린 내게 일을 시켰다고 투정부리는 게 아니다. 내 몫은 스스로 하는 게 맞다. 하지만 “해 버릇해야 돼”라는 말은 내게만 해당됐다. 거기에는 “넌 계집애니까”가 빠져있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어릴 때는 아빠의 밥상을, 더 큰 뒤에는 동생의 밥상까지 차려줘야 했으니까.

나는 한 번도 여성이기를 ‘선택’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내가 ‘여성의 역’을 맡기를 바랐다. 하지 않으면 미워하니 대들더라도 결국 하는 수밖에 없었다. 25년간 ‘일상의 폭력’에 시달리고 나서야 나는 해방됐다.

집에서는 내게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면, 사회에는 기회가 있다. 한때 여성에게 선택할 권리가 없던 것을 생각하면 나아진 듯하지만 선택지는 일과 양육뿐이다. 직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려는 여성은 직업과 아이를 맞바꿔야 한다. 그나마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면서. 한 쪽을 택한 여성은 ‘내 선택이 틀린 건 아니겠지’하며 불안해한다. ‘절반의 확률’을 움켜잡은 여성은 절박하다. 절반이 전부이기에 행복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애를 쓸수록 더욱 불행해진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선택은 때로 폭력과 억압의 도구가 된다.

▲ 직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려는 여성은 직업과 아이를 맞바꿔야 한다.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 갈무리. ⓒ 와인스타인 컴퍼니 제공

일과 육아 중 하나를 택했다고 해서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게 맞는 걸까? 남성이 직업과 아이 중 한쪽을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여성도 그럴 수는 없나? 스테퍼니 스탈은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일과 양육이 주는 만족도를 비교하려는 시도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며 ‘어느 한쪽이 월등히 더 좋거나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욕구에 부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과 양육을 병행하라’는 미디어의 사탕발림은 전제부터 틀렸다.

더 큰 문제는 여성의 선택을 일과 양육에 한정하는 것이다. 남성의 삶을 하나로 획일화할 수 없는 것처럼 여성의 삶도 일과 양육으로 양분할 수 없다. 앞으로 삶이 일과 양육뿐이라면 차라리 나는 방랑자로 살겠다. 스스로 선택할 폭이 넓을 때 개인이 행복해질 가능성이 크다. 사회도 다양해질 수 있다. 누구도 가난이나 불행을 선택하지 않듯, 여성도 지금까지의 여성을 택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편집 : 김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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