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나’

▲ 민수아 기자

내가 울보였다니! 주변 사람들에게 눈물을 자주 보이는 요즘이다. 선생님께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하다가도 울어버렸고 친구와 말다툼을 하다가도 그랬다. 최악은 술에 취해 가정사까지 들먹이면서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쓸데없는 것을 오래 기억하는 습관 때문에 최근 며칠 잠자리에 들었다가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 이불을 걷어찬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 나는 자기연민에 빠진 채 눈물로 위기상황을 모면하곤 한다. ‘여자의 눈물은 무기’라는 편향적인 말에 반감을 갖지만 실제로는 눈물을 무기로 활용한다. 눈물로 다른 사람의 이해와 배려를 요구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일 텐데…. 자기표현에 미숙한 내가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보인 것이라고 자꾸 변명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커져간다.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미국의 심리학자인 마이어스(Myers)와 브릭스(Briggs)가 융(Jung)의 심리유형론을 토대로 고안한 성격유형 검사 도구다. MBTI는 4가지 기준에 따라 수검자를 16가지 심리유형 중 하나로 분류한다. 정신적 에너지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외향-내향(E-I) 지표, 정보수집을 포함한 인식의 기능을 나타내는 감각-직관(S-N) 지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고-감정(T-F) 지표, 인식 기능과 판단 기능이 실생활에서 드러난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판단-인식(J-P) 지표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몇 가지 질문에 답했더니 내 성격 유형은 ISFJ형으로 나왔다. 이런 형 인간은 정신적 에너지는 내부(Introversion)를 향하고 감각(Sensing)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감정(Feeling)에 기초해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판단(Judging)한 내용을 기초로 계획적 생활을 한다. 몇 가지 질문으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유형화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지만 내게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ISFJ형 인간의 일반적인 특성은 아래와 같다.

‘자기 의견을 끝까지 주장하지 못하고 다수 의견에 따르게 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 힘들어하며 1:1 대화를 선호한다. 보수적이며 새로운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주장이 강한 데도 표현이 적어 속병(위장병, 심장병 등)이 많다. 나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다. 남에게 상처를 줄까 봐 말조심한다. 철저하게 겸손하며 뽐내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다. 어른들이 좋아하나 본인은 힘들다. 끈기 있고 성실하며, 안정감이 있다. 특성상 큐레이터, 개인비서, 사서, 중간운영자, 일반의학 종사자가 되면 일을 잘할 수 있다.’

어울리는 직업란에 내가 원하는 직업이 없어서 검사결과를 인정하기 싫지만, ‘누가 나를 지켜보고 썼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았다. 요즘 자주 운 이유도 찾을 수 있었다. 여태 유지해온 면종복배(面從腹背)의 태도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임계치를 넘어버린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생각하는 바대로 표현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 능력에 과분한 기대감을 안고 살아가는데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결국,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이 눈물로 마무리되었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부분까지 통제하려고 하는 강박이 나를 옭아맨 것이다. 지나치게 자아 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무한경쟁 시대에 ‘성격도 경쟁력’이라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무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 ISFJ형 인간은 정신적 에너지는 내부(Introversion)를 향하고 감각(Sensing)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 pixabay

그래서일까? 나는 이중성 또는 입체성이 드러나는 콘텐츠를 좋아한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이다. 나는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과 상관없이 이 문장을 좋아한다. 모순적 문장의 대구에서 왠지 모를 쾌감이 느껴진다.

화가로는 고흐를 좋아한다. 미술에 대해 잘 몰라서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미술가 중에 겨우 취향을 찾은 게 고흐다. 그의 복잡한 정신세계와 따뜻한 색감에서 오는 괴리감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는 <500일의 썸머>를 좋아한다. 이 영화는, 같은 상황을 두고 두 남녀 주인공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해석하는 장면을 번갈아 보여준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입체적 해석.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에 들어있는 공통적인 코드다. 내가 위 세 가지 콘텐츠를 좋아하는 이유는 표현되지 않는 나의 이중적인 마음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에서 온 것이라 짐작한다.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답답이’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장한 ‘아비투스’ 개념을 적용해서 이해하자면, 개인이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후천적으로 형성된 성격과 기질이 취향으로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인문학이 사실 인간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부실한 건축물이 아닐까?’ 유시민 작가가 팟캐스트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에서 요즘 내가 느끼는 고민의 극복 방안을 찾아보려 한다. ‘부실한 건축물’일지라도 최대한 다양한 인문학의 내용을 접하면 ‘나’라는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배움에서 깨달음을 얻겠다’는 결론이 지어져서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다.

요즘 자주 눈물을 보인 이유를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까지도 글을 읽는 사람에게 ‘내가 어마어마하게 예민한 사람이니까 건들지 마라’는 메시지로 읽힐까 걱정하는 게 나다. 그렇다고 지난해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로 대표되는 상업화한 ‘탈(脫)호구’ 담론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지독하게 싫은 내 모습이지만 업보라고 생각하는 게 자존심이 덜 상한다. 적어도 나에 대한 오만과 편협에 빠져 ‘나의 민낯’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만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배움이 필요한 사람이 바로 나, 민수아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8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1학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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