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최성문 ‘하루를 쓰다’ 작가

“‘하루를 쓰다’에는 많은 뜻이 있어요. 하루를 ‘살다’라는 뜻도 있고, 글로 ‘쓴다’, 또 하루를 써서 ‘공유’하는 것까지 의미하는 거죠.”

아트랩 꿈공작소 대표 최성문(44) 작가는 바쁜 일상 속에 시간의 의미를 잊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의 하루는 소중하다’고 말을 건넨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숫자와 이름을 받아 달력을 만드는 ‘하루를 쓰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5월 24일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 작가는 활기 가득한 모습으로 ‘하루’의 의미를 설명했다.

▲ ‘하루’의 의미를 설명하는 최성문 작가. ⓒ 박상연

숫자와 이름에 응축된 각각의 소중한 삶

최 작가는 일정한 주제에 맞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직접 손으로 쓴 글씨를 모아 한 해의 달력을 만든다. 그러므로 달력에는 365명의 손길이 어우러진다. 2015년 달력의 주제는 ‘소중한 하루를 잃어가는 노숙인들과 함께 쓰는 하루’였다. 1월과 12월은 노숙인과 자원봉사자, 2월은 외국인, 3월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친구, 4월은 문화예술인, 5월은 유치원생, 6월은 탈북인, 7월은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 8월은 발달장애와 지적장애인, 9월은 농촌 사람들, 10월은 광장의 시민, 11월은 암 환자들이 참여했다.

▲ ‘2015 하루를 쓰다’의 연간 달력. 하나씩 뜯어내는 일력과 탁상용 월력 등으로도 제작됐다. ⓒ 아트랩 꿈공작소

도시 빈민과 노숙인에게 무료급식을 하는 단체인 바하밥집에서 지난 2009년부터 봉사활동을 했던 최 작가의 경험이 ‘하루를 쓰다’ 기획의 계기가 됐다. 노숙인들에게도 공평한 24시간, 하루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2014년 1월, 그는 밥집 한편에 종이와 먹, 붓을 놓고 노숙인들에게 달력의 하루를 채워나갈 숫자와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밥을 먹으러 왔던 노숙인들이 하나씩 붓글씨를 써주었다. 지난 2013년 겨울 아트랩 꿈공작소(www.facebook.com/artdreamlab)를 차린 최 작가는 이렇게 모은 한 장 한 장의 숫자와 이름으로 달력을 만들고, 작업 과정을 담은 사진과 영상, 노래 등의 복합 예술작품을 내놓았다.

글씨를 받으며 배우고 성장하는 작가 

“‘하루를 쓰다’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고, 하루를 더욱 특별하게 쓸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만나는 많은 이들이 저에게 주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한 사람을 만나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삶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사회의 속살을 아주 조금 만지는 것 같을 때가 많아요.”

밥집에 찾아온 노숙자들 외에는 최 작가가 한지와 붓을 들고 일일이 사람들을 만났다. 붓과 먹은 한 번 쓰고 깨끗이 말려야 하기 때문에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쓴 원본을 스캔해 ‘하루를 쓰다’ 달력을 만들고, 원본은 한데 모아 기획 전시를 했다.

참여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루를 쓰다’ 프로젝트의 마침표는 ‘비어있는 하루’다. 2015년 달력의 경우 10월 31일을 비워두고 달력을 산 사람이 365번째 주인공으로 채워 넣을 수 있게 했다.

“시간은 무한대라는 철학을 달력에 담은 것이기도 해요. 달력을 구매하는 누구나 하루의 주인공이 되고, 이로써 365일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무궁무진하게 증식하는 거죠.”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최 작가에겐 일정한 벌이가 없었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고 주변의 응원과 도움이 있어 밀고 나갔다. 달력을 완성한 2014년 9월 이후에는 주로 SNS를 통해서 홍보했고 가수의 콘서트에서 팔기도 했다. 그는 “연말이었는데 소득은 별로 없고 덜덜 떨다가 온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무언가를 팔아 본 것이 처음이라 위축되기도 했지만 “이런 훌륭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 당당하게 제안하라”는 지인의 조언에 힘을 얻었다. 나중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와디즈’의 제안으로 온라인을 통해 591명의 후원자로부터 2015만원을 모금 받아 달력 제작과 배포에 활용할 수 있었다.

“저 혼자 꿈만 꾸고 행동하지 않았다면 망상이 된 채로 꿈이 이뤄지지 않았을 거예요. 이 프로젝트가 참여예술인만큼 함께 해서 꿈이 현실이 된 거죠.”

▲ 프로젝트 기획과 작업 과정을 설명하는 최성문 작가. ⓒ 박상연

2017년 판은 ‘아시아인과 함께 쓰는 하루’ 

최 작가는 현재 ‘아시아인들과 함께 쓰는 하루’라는 주제로 2편을 제작하고 있다. 2017년 달력에는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족, 난민 등의 하루를 담는다. 또 세계 속의 아시아인을 담기 위해 해외로도 나간다. 1~2월에는 다문화 사람들, 3월 터키인, 4월 네팔인, 5월 일본인, 6월 탈북인, 7월 중국인, 8월 몽골인, 9월 난민, 10월 SNS 친구들, 11월 노숙인, 12월 다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구성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이미 지난해 7월과 8월 터키와 네팔, 일본을 다녀왔고, 올해 6월에는 중국의 현대 미술가들을 만나고 왔다. 해외 작업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통역의 도움도 받았지만 몸짓 언어를 최대한 활용하며 상대와 소통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아시아 편을 작업하면서 여러 아시아인을 만났어요.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 뭉클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시아인들이 제각기 문자로 자신의 하루를 담잖아요. 문자가 지니는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번 달력에는 그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죠.”

이번에는 많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한지와 붓 대신 도화지와 캘리그라피 펜을 활용했다. 그래도 원본을 온전하게 보관하며 이동하는 것이 힘들었고, 항상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네팔에서 작업할 때는 타고 가던 차가 마주 오던 대형버스와 충돌하는 사고도 당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진 않았지만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또 너무 피곤한 나머지 지진으로 벽에 금이 간 여관에서 무서운 줄도 모르고 잠에 빠지기도 했다.

▲ 최성문 작가가 네팔을 찾았을 당시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지진사고의 잔해. ⓒ 아트랩 꿈공작소

대지진 발생 후 3개월 정도 지났을 때라 모든 것이 어려웠던 현지에서 최 작가는 빈민촌 여성들에게 한국에서 천으로 만들어 가져간 대안 생리대 640개를 나눠주며 숫자와 이름을 받았다.

연예인도 암 환자도 행복하게 참여 

“제가 만난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 모두 나름대로 자신의 하루를 귀하게 생각하고 산다는 걸 느껴요.”

최 작가는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에 4명 이내로 만나면서 오롯이 상대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대장암 말기였던 한 지인은 아픈 상황에서도 직접 참여하고 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며 이름과 숫자를 썼다. 연예인 양동근 씨도 어릴 때 만들고 남들에게 보인 일이 없었다는 한자 사인을 흔쾌히 기부하며 ‘하루’에 참여했다.

▲ ‘하루를 쓰다’의 2017년 6월 25일은 탈북인 조동현 군이 채웠다. ⓒ 아트랩 꿈공작소

‘하루를 쓰다’ 2015년 달력 표지는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신영복 교수가 직접 썼는데, 최 작가는 신 교수의 글씨체 ‘7’을 기부받아, 2017년 표지도 고인의 필체로 채웠다. ‘하루를 쓰다’ 2017년 판은 오는 11월부터 판매된다. 수익금은 노숙인을 비롯한 소외계층과 다문화인들을 위해 쓸 예정이다.

“글씨를 보면 신기하게도 그 사람이 보여요. 글씨에 그가 그대로 담기는 것과 같은 거죠. 더 크게 보면 ‘하루를 쓰다’는 단순히 날짜와 이름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와 삶을 담는 일이에요.”

예술가가 사회를 바꾸긴 어렵지만,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최 작가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하루’에 담아 소통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편집 : 강민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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