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연민은 사라지고 공포만 남은 시대

   
▲ 강민혜 기자

기원전 532년경부터 그리스 원형극장 배우들은 비극 대본으로 연기를 펼쳤다. 시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도 당시 상연했던 작품 중 하나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과 함께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천형과도 같은 운명을 피하려고 평생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 노력이 오히려 끔찍한 운명을 실현하는 행동이었음을 스스로 밝혀낸다.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가장 훌륭한 문학이라고 보았다. 타인의 비극적 삶을 통해 공포를 경험하고 연민을 느낌으로서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학>에서 “연민과 공포를 환기하는 사건(비극)에 의한 감정의 카타르시스(정화)”를 강조한 것과 맥이 닿는다.

▲ 고대 그리스 연극 장면 도자기 그림. 루브르 박물관. ⓒ 김문환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느낀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는 21세기에도 통용되고 있을까? 현대인들의 공포와 연민을 돌이켜보자. 지난해 9월, 터키 해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였다. 어른들이 벌인 전쟁의 죗값을 세 살배기 아이가 치러야 한다니…. 시리아 난민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유럽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 난민에게 문을 열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극에 따른 공포와 연민이 발현된 셈이다.

지중해에서 사투 중인 쿠르디 같은 아이들은 셀 수없이 많다. 유엔 산하 아동구호기관 유니세프에 따르면 터키에서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들어온 난민의 35%가 어린아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파스칼의 명언에 잘 드러난다. “생각하는 갈대.” 해안은 적막하고 유럽의 문은 다시 닫혔다. 그 전에 유럽에 도착한 난민 어린이 중 1만여 명은 소재 불분명 상태다. 유럽연합(EU) 공동 경찰기구 유로폴은 아이들이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성매매나 노예 등으로 팔려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현대인에게 난민은 도와야 할 대상이 아닌 위험한 존재로 둔갑한다. 프랑스 풍자주간지 사를리 에브도는 “쿠르디가 살았다면 커서 성범죄자가 됐을 것”이라는 내용의 만평을 실어 논란을 빚었다. 또 폴란드 보수 성향 잡지 wSIECI는 ‘이슬람이 유럽을 강간한다’는 제목의 사진을 표지로 쓰기도 했다. 국경을 넘으려는 난민들을 향해 터키군은 총까지 겨눴다.

쿠르디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4월 19일 난민 500명을 태운 배가 또 한 번 지중해에서 침몰했다. 하지만 현대인의 ‘연민’은 파도에 씻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공포’뿐이다.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통해 인류애로 승화시키는 꿈을 꿀 수 없는 시대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 1학기에 개설되는 인문교양수업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담당교수 김문환)].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한 서양 문명사 강의가 펼쳐집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 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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