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유혹하는 에디터2] ⑧ 어색한가? 제돌이의 운명(상)

▲ 고경태

어색한가?

어색함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자연스럽지 않을 때다. 질서에 어긋나 보일 때다. 질서란 무엇인가. 오랫동안의 약속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으레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것으로 묵인되어온 방식이다. 어느 날 다르게 하면 어색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이상하다”는 손가락질이 쏟아진다. 원래 자리와 방식으로 돌아가면 마음이 편하다. 비난도 사그라진다. 미련하게 어색함의 강을 계속 헤엄치면 어떻게 되는가. 조심! 강 한 가운데서 물귀신이 될 수 있다^^. 강을 무사히 건너 신천지의 뭍에 오르면 어색함은 참신함으로 바뀐다.

<한겨레> 토요판은 2012년 1월28일 첫 호를 내자마자 언론계의 과분한 주목을 받았다. 만발하던 우려는 격려로 역전하는 분위기였다. 1면부터 끝까지 지면 구성을 과감하게 흔들었음에도, 내부에서 어색하다는 비판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초기의 1면 보도가 한몫을 했다. 첫 호와 둘째 호(2월4일치)의 1면 커버스토리(커버)는 뉴스특종이었다. 고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와 정수장학회 최필립 이사장을 각각 인터뷰한 커버 기사들은 왜곡보도를 일삼는 수구언론에 맞불을 놓거나 대선과 관련한 이슈였다. 문제는 1면의 정치·사회적 성격이 옅어지고 난 그 다음이었다.

깊은 태클

2월11일치 커버 제목은 ‘푸틴의 나라’였다. 헌법을 고쳐 3선에 도전하는 ‘러시아의 박정희’ 푸틴의 야망과 러시아 정세를 분석한 국제물이었다. 그 다음 2월18일치 커버 제목은 ‘서태지와 아이돌’이었다. 서태지 데뷔 20돌을 맞아 그의 빛과 그림자를 아이돌 가수들만 살아남는 대중음악계 현실과 견줘 조명하는 기사였다. 그 다음 2월25일치 커버 제목은 ‘조광래의 옐로카드’였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갑자기 경질 당한 그를 두 달만에 처음으로 만나 축구계에 던지는 쓴소리를 보도했다.

어색한가?

어색하다는 말들이 나왔다. 한가해 보인다고 했다. 아무리 토요판이어도 일간신문 1면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교체 요구’로 이어졌다. ‘후보 선수’들은 즐비했다. 벤치에서, 아니 커버 하단 스트레이트(스트) 공간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편집인이었다.

당시 매일 오후 2시 반 신문사 8층 회의실에서 열린 대편집회의. 편집국장과 논설실장, 이 두 부문을 총괄하는 편집인 등 고위 편집간부들이 참석해 논조 등을 조율하는 자리였다. 2월17일 금요일 대편집회의 때 편집인이 겨냥한 첫 표적은 ‘서태지와 아이돌’이었다. 나중에 편집국장에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돌? 이런 아이템을 커버로 한다고? 1면에 ‘판사회의’ 기사(서울 중앙지법 등 3곳의 단독판사들이 현행 법관 연임제와 근무평정제도를 투명하게 개선하라고 대법원에 촉구했다는 내용)가 잡혀있던데 그게 더 중요하지 않나? 그게 톱이어야 하지 않나? 1면의 서태지 기사와 사진은 밑으로 내리고, 3·4·5면의 본문기사는 8·9면 쯤으로 돌리는 게 맞지 않나?”

다음 주인 2월24일 금요일 대편집회의에서도 ‘태클’이 들어왔다고 했다. 커버로 준비한 ‘조광래의 옐로카드’와 당일 발생한 정수장학회 주식반환소송(정수장학회 전신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김지태씨 유족이 빼앗긴 주식을 돌려달라고 낸 소송을 법원이 기각했다는 내용) 기사를 맞바꿔야 한다는 거였다. 편집국장은 편집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서태지와 조광래 두 가지 커버 모두 원래대로 내보냈다. 한겨레에서 편집국장은 기자들의 투표로 선출한다. 편집인이 직급상 편집국장보다는 높지만 지시가 일방적으로 먹히는 관계는 아니다.

‘판사회의’와 ‘정수장학회’는 다른 언론도 보도한 발표기사였다. 메가톤급 대형사건이 아닌 한, 사전에 준비한 기획물을 우선한다는 게 편집국 에디터단에서 합의한 토요판 1면의 매뉴얼이었다. 시의성 있는 정치·사회 이슈에 리듬을 맞춰 1면 커버 특종을 하면 금상첨화겠지만 항상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서태지를 조명하는 글이 머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러시아 대선이 아니어도 푸틴이, 당장 축구대표팀과 관련한 화제가 없어도 조광래가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동물이라고 안 되란 법은 없었다.

점입가경?

정말 동물이 등장했다. 조광래 커버 다음 주인 3월3일치였다. 토요판 커버를 못마땅하게 보아온 이의 눈으로 볼 땐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나올 만 했다. 푸틴과 서태지와 조광래가 기존의 신문 편집관행으로 볼 때 어색하다 해도, 누구나 아는 유명 인사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한데 명망가도 아니고, 아예 사람도 아니다. 돌고래다. 제주도에서 왔다 하여 ‘제돌이’로 불린다는 이 돌고래는 과천의 서울대공원 공연장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묘기사진으로 1면에 등장했다. 단 한번도 언론을 탄 적 없는 ‘듣보잡’이었다. 제주 앞바다에서 불법포획한 수족관 업자가 재판을 받고 있었다. 재판 여부에 따라 돌고래가 방사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사 제목은 ‘제돌이의 운명’.

편집국장에 따르면, 대편집회의에서 편집인은 더욱 강한 어조로 돌고래 기사를 밑으로 내리거나 뒤로 빼야 한다고 말했다. 대선의 해인 2012년에 스트를 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돌고래를 갖고 1면에 쓰면 웃음거리가 된다는 말까지 했다. 1면 커버를 바꾸라는 지적이 3주째 계속되자 편집국장도 슬슬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가는 눈치였다. 에디터들과 각 부장들이 참여하는 편집회의에서도 돌고래 기사의 적절성에 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마침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행정관이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 컴퓨터를 부수라고 지시했다’는 스트 기사가 1면에 실리기로 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알리는 게 중요한가, 아니면 돌고래를 풀어주라는 재판을 알리는 게 중요한가.’ 그런 질문에 선뜻 돌고래가 먼저라고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돌고래가 1면 머리를 꿰차는데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첫째, 참신하고 재밌었기 때문이다. ‘돌고래 재판’이란 얼마나 새롭고 신기한가. 돌고래의 드라마와 한국 동물복지운동의 진일보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기사였다. 돌고래가 일간신문 1면 머리로 나온 전례는 없었다. 전례가 없으므로, 우리가 첫 전례를 만들 기회였다. 둘째, 차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간인 불법사찰 보도는 <오마이뉴스> 등이 마감날 오후 이미 내보낸 터였다. <한겨레>가 아니어도 다른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돌고래는 <한겨레>만 쓰는 기사였다. 셋째, 깊이를 갖췄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넘어 문명의 흐름을 보여주는 기사였다. 기로에 선 돌고래는 인간과 동물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묻고 있었다. 이 기사는 당시 사회부에서 환경을 담당하던 남종영 기자와 토요판팀의 최우리 기자가 썼다. 남 기자는 돌고래에 관한 한 한국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이다. (제돌이 기사의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 좀 더 자세히 다룬다)

편집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편집국장은 물론 야근책임을 맡은 에디터에게도 전화를 해(당일 편집국장은 일이 있어 일찍 퇴근한 상태였다) “돌고래 기사를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압박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국에 돌고래 한 마리가 정권의 부도덕을 고발하는 기사보다 크게 들어가는 현실을 답답하게 여기는 듯 했다. 나는 버티다가 조금 물러섰다. 각각 저녁 6시반경과 9시경 인쇄하는 1·3판에선 커버 사진 밑에 5단 가로로 실은 기사를, 10시반경 인쇄하는 5판부터 오른쪽 2단에 세로로 싣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하단에 있던 청와대 행정관의 민간인 불법사찰 기사는 좀 더 위로 올라가 편집되었다. 그래봤자 7cm 가량이었지만.

▲ 2012년 3월3일치 <한겨레> 토요판 1면의 3판(왼쪽)과 5판. 돌고래 커버에 대한 우려는 관련기사를 오른쪽으로 밀어냈다. ⓒ 한겨레

돌고래 커버를 지키려는 고집은 지나쳤을까. 비단 편집인이 아니더라도 돌고래 1면 기사에 정서적 거부감을 느낀 편집국 구성원들은 적지 않았다. 몇몇 후배들한테서도 “처음엔 그 기사가 조금 어색하고 불편했었다”는 고백을 나중에 들었으니까. 당장은 여러 사람의 동의를 얻기 힘들었다. 실제 제돌이 기사가 나간 당일 바로 한 독자는 장문의 항의메일을 신문사에 보냈다. <한겨레> 시민편집인실에서는 3월28일자 옴부즈맨난에 메일 내용을 요약해 다음과 같은 기사로 전했다.

독자의견

토요판, 연성기사에 치우쳐
의제설정에서 밀리는 것 아닌가

대학 시절부터 <한겨레>를 구독했다는 한 독자가 3일 전자우편으로 ‘토요판에 대한 의견’을 보내왔다. 그는 “요즘 총선과 대선이 있고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모색하는) 정말 중요한 시기”라며, 큰 이슈들이 토요판에서 너무 소홀히 취급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토~일요일 이틀에 걸친 신문에서 (현안은 외면한 채) ‘푸틴’ ‘서태지’ ‘돌고래’ 기사를 읽어야 하느냐”며 바쁜 독자들을 위해 한 주일에 있었던 부문별 주요 이슈들을 심층적으로 짚어주고 전망하는 지면을 늘려줄 것을 주문했다.

이 독자는 읽을거리도 중요하겠지만 주제를 정할 때 의제설정이나 가독성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을 호흡이 긴 기획기사로 채우면 너무 신문이 무거워져 읽기에도 벅차다”고 지적했다. 그는 “독특하고 말랑말랑한 기사만으로 한겨레 독자층이 넓어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한겨레>다운 기사로 한국 신문을 선도하고 사회적 이슈를 선점해줄 것을 부탁했다.(구세라 시민편집인실 차장)

신문 콘텐츠를 비평하고 심의하는 사내 콘텐츠평가실에서는 3월12일 ‘토요판 기획심의’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 편집국 전 구성원에게 이메일로 뿌렸다.

(앞 생략) 뉴스에 대한 기동성 있는 보도·분석·논평과 의제설정은 언론의 핵심임무다. 특히 보수언론의 목소리가 큰 우리 사회에서, 이런 요구는 더 크다. 진보적 언론으로서 <한겨레>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토요판에 관한 한 이런 기능을 사실상 방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신 그 자리를 ‘읽을거리’가 차지한다. 이런 기사들을 선호하는 독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고려해서는 <한겨레>의 기반을 스스로 잠식시킬 수 있다. 창간 이후 위기의식을 갖고 여러 차례 지면개편을 했지만, 그때마다 확인한 것은 언론으로서 본분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국내외적으로 큰 전환기인 지금은 더 그렇다.

지금의 토요판 체제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개선방안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3월3일치에는 ‘제돌이의 운명’ 대신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를 커버스토리로 하고, 2월18일치에는 ‘서태지와 아이돌’ 대신 ‘법관 심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식이다. 이렇게 커버스토리와 현안을 일치시키고 덧붙여 2면의 긴장성을 높인다면 일정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기동성 있게 커버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지면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다른 요일에는 통상 8~9개 면의 종합면을 운영한다. 항상 그 정도의 뉴스가 있는 것이다. 토요일치임을 감안해 압축하더라도 최소한 6개 정도의 뉴스·해설 면은 필요하다고 봐야 하므로, 1면에서 6면까지를 뉴스·해설면으로 해 집중도를 높인다. 커버스토리는 7~8면으로 옮기되 1면에 적절한 크기의 사진과 기사의 일부를 싣는다. 물론 커버스토리의 뉴스성이 강하다면 지면 앞쪽에 배치할 수도 있겠다.

그깟 돌고래

어색한가?

편집인과 일부 독자와 콘텐츠평가실은 한목소리로 “어색하다”고 말한 셈이다. 그 말 속에서 키워드를 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대선, 현안, 읽을거리 노, 연성기사 노노, 한겨레 정체성 예스!’ “현안”이라는 낱말을 돌에 새겨 사무실에 세워두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비판적 의견을 낸 독자나 콘텐츠평가실의 의견에도 나름 논리가 있었지만, 내 머릿속 서랍에 고이 모셔둘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콘텐츠평가실의 ‘기획심의’ 를 읽자마자 곧바로 그 자리에서 반박하는 글을 썼다. (고심 끝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앞 생략)가령 토요판에선 이런 논쟁거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신문의 생명은 뉴스라는 고전적 명제를 토요판에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디지털 시대에 독자들은 종이신문을 통해 뉴스를 어떤 형식으로 소비하는가. 기존의 뉴스편집방식이 토요판은 물론 주중신문에서도 언제까지 유효한 것인가. 이는 신문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의미있는 질문이고 논쟁이 되는 사안이다. 둘째 진보적 가치란 무엇인가. 제돌이의 운명보다 청와대 행정관의 민간인 사찰이 훨씬 더 진보적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기획심의는 일방적 단정 뿐이다.) 제돌이의 경우 진보의 최신 트렌드를 앞장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전범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청와대 행정관의 민간인 불법사찰 컴퓨터 파괴 기사가 제돌이 위에 톱으로 실리는 게 독자의 입장에서 좋을 뿐 아니라 진보적 의제를 선점하고 이 문제와 관련해 한겨레가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유리했다고 보아야 타당한가.

셋째 시의성이란 무엇인가. ‘시의성’이란 말을 쉽게 쓰고, 신문에선 반드시 시의성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는 듯 보인다. 한데 누구나 보도하는 뉴스를 따라가는 게 시의성인가? 아무도 보도하지 않던 뉴스를 우리가 먼저 보도하고 결국은 그게 시의성 있는 보도가 되도록 하는 건 시의성이 아닌가? 보통 ‘이게 웬 뜬금없는 뉴스야?’하는 비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게 적절한 비판일 때도 있지만 부적절할 때도 있다. 가끔 ‘뜬금없는 뉴스’에서 힘을 느낀다. 첫발을 떼는 기사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현안이냐 현안이 아니냐, 연성이냐 경성이냐는 분류법은 맞는가. 아니라고 보았다. 콘텐츠를 두 가지로 나누려면 차라리 잘 썼냐 못 썼냐, 깊이가 있냐 없냐, 삶에 통찰을 주냐 못 주냐, 이야기가 풍부하냐 빈곤하냐로 구분하는 게 옳지 않은가? 또한 뉴스에 대한 논평과 의제설정은 의미있고, 이른바 ‘읽을거리’는 하찮은가? ‘그깟 돌고래’는 읽을거리에 불과한가? 읽을거리는 성찰거리가 될 수 없는가? 돌고래로는 의제설정을 못하며 이 문제는 한겨레 정체성과 어긋나나? 아니 그 이전에 돌고래가 1면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근본적으로 어색한가?

익숙함으로만 세상을 바꿀 순 없다.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변화는 어색함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어색함을 견디고 포용하는 열린 자세가 혁신을 부른다.

토요판은 제돌이 등에 올라타 어색함의 강에, 아니 바다에 뛰어들었다. 보도되기도 전에 사내 논쟁에 휘말렸지만 첫 고비를 넘겼다. 이제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끼어든 2차 논쟁이…. 

<다음회에 계속>


고경태. 한겨레 편집국 신문부문장. <유혹하는 에디터>에서 <1968년 2월 12일>까지 4권의 책을 썼다. 2009년에 낸 <유혹하는 에디터>가 편집자를 다뤘다면, 2016년의 이 연재물은 편집장 이야기다. <한겨레21> 편집장, <씨네21> 편집장, esc 팀장,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문화스포츠 에디터, 토요판 에디터 시절의 에피소드로 버무릴 예정이다. 격주 연재.  

편집 : 김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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