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화성: 정조와 다산의 시대를 거닐다

불취무귀(不就無歸). ‘이루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는다.’ 다산이 모시던 조선의 스물두 번째 왕 정조가 화성 동쪽 군 지휘소 연무대에서 외친 건배사다. 연무대에는 화성 축조에 힘쓴 기술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수라간에서 준비한 반건조 대구포 요리를 안주로 왕과 함께 취할 때까지 마셨다.

▲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 ⓒ pixabay

다산의 시대에는 제왕과 기술자가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멸시의 시대’가 도래했다. 정조와 다산의 ‘애민사상’은 온데간데없고 기념식 축사에서만 ‘존경하는’이라는 형용사를 국민 앞에 붙인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소장은 다산사상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역설했다.

▲ 수원 화성 동쪽 군지휘소 동장대. 이곳에서 정조는 화성 축조에 참여한 기술자들을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 손성배

그들이 말로만 존경하는 국민은 국가를 위해 복무했다. 세월호 민간잠수사 김관홍(43)씨 역시 그랬다. 그는 17일 오전 숨진 채 발견됐다. 자신의 잠수 기술로 바다에 갇힌 이들을 구해야겠다는 일념 하나 가졌을 뿐인데 버림받았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국민 멸시’ 정부의 민낯이 세월호 참사를 분기점으로 더욱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 박석무 다산연구소장이 실학박물관에서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성과와 애민사상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 손성배

정조와 다산의 실험장, 화성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은 지난 5월 14일 ‘경기실학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박석무 소장은 남양주 다산 유적지를 돌아본 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실학박물관으로 참가자들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박 선생은 ‘왜 오늘도 다산인가, 왜 우리가 지금 다산을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다산은 75년을 살았다. ‘백세시대’가 도래했으니 이제 75세는 장수가 아니지만 18세기 조선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었다. 다산은 오래 살면서 국왕의 신임을 받았지만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고난을 겪기도 했다.

올해는 다산이 별세한 지 3주갑, 곧 180년 되는 해다. 다산은 1836년 병신년 세상을 떠났다. 박 소장은 20분 강연을 약속하고도 40분 넘게 연설에 가까운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박 소장은 다산이 힘을 쏟은 모든 분야에서 절정에 이른 최고의 학자라고 소개했다. 지리학·의학·공학에 음악까지 두루 섭렵한 박학다식한 학자가 그였다. 정조는 다산에게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현할 장소를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정조의 실험장은 화성이었다.

▲ 창룡문에서 동장대로 이어지는 화성 안쪽 성곽길. 깎아지른 바깥쪽과 달리 경사가 완만해 수성전에 편리하다. ⓒ 손성배

화성의 예상 공사 기간은 10년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10년간 토목공사에 집중하다가 정치적 반대파의 공격에 취약해질까 우려했다. 급히 거중기와 활차(도르래)를 만들었다. 자신이 모시는 군주를 지키면서도 직접 나와 일하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가 발명한 공사 기구에 담겨 있었다.

공사는 2년 9개월 만에 끝났다. 경비도 4만 냥 절감했다. 박 소장은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불출세’(不出世)의 인간이 바로 다산이었다”고 말했다. 다산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사서오경에 음악을 보태 ‘사서육경’이라고 불렀다.

“다산은 음악사상을 정리한 악서고전을 집필했습니다. 분서갱유 이후 경서를 복원할 때, 악경을 복원하지 못했거든요. 다산은 음악이 정치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절대로 괄시하지 않았지요. 동양에서 음악 이론으로는 어떤 학자도 다산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다산이 지금 사람이라면 시국선언에 서명했을 것”

실학박물관을 떠나 한 시간 남짓 차를 달려 화성에 도착했다. 이동중에도 참가자들과 박 소장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박 선생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평생 곤경에 처하게 된 다산을 좌익으로 몰려 사법살인을 당한 조봉암 선생에 견주어 설명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도연경(서울 성북구)씨는 “다산 유적지와 실학박물관에서 조선 후기 백성들에게 필요한 학문을 하려고 했던 학자들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며 현세대 학자들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박 소장은 어떤 사상이나 논리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무효라고 말했다.

“과거 독재에 대항하는 학생들을 교수가 분리하고 가로막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세월호 문제도 시국선언에 서명한 교수보다 안 한 교수가 더 많습니다. 다산이었다면 모든 서명에 참여했을 겁니다. 교수와 학생이 똑같이 지성인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 정조와 다산의 꿈이 담긴 수원 화성 모형. 수원 팔달구 매향동에 자리한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다. ⓒ 손성배

화성 톺아보기는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가 맡았다. 화성에는 정조와 다산의 애민사상이 함축돼 있었다.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헌경왕후(혜경궁 홍씨)가 묻혀있는 융릉을 조성할 때 옮겨온 백성들이 머물던 곳에 세워졌다.

초기 설계도대로 공사를 진행하면 이주한 백성들이 또 이사를 해야 했다. 정조는 성곽길이가 길어지더라도 설계도를 고치기로 했다. 예정지에 꽂혀 있는 깃발을 뽑아 바깥으로 옮겼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은 그렇게 본래 자리보다 동쪽으로 더 이동해서 자리를 잡게 됐다.

화성에서 정조는 새 조선으로 도약하기 위한 실험을 하려고 했다. 일각에서는 천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준혁 교수는 “때가 되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 내려와 ‘경자유전’을 비롯한 사회민주주의 개혁 조선을 실현해보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다산이 꿈꾼 건 복지국가

경자유전(耕者有田)은 농사짓는 사람만 토지를 갖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하지 말자는 제도다. 다산이 정조에게 제안한 제도다. 다산은 이어 노인과 영유아, 중증 환자, 상을 당한 이들, 재난을 당한 이들을 도와주는 복지국가를 꿈꿨다. 정조는 다산의 이러한 제안을 바로 화성에서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다산은 목민관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의 대표 저서 <목민심서>를 통해 붙들어주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공복(公僕)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렸다. 박 소장은 “고위공직자들이 하나같이 병역 기피, 논문 표절, 위장 전입, 세금 탈루를 하고 있는 시대”라며 다시 다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말했다.

유혜강씨는 백기완 선생과 함께 한 ‘시인 신동엽 생가 동행’에 이어 경향 70주년 명사 동행에 두 번째로 참가했다. 생활 한복을 입고 박 소장과 동행한 유씨는 “다산 유적지와 화성에서 그의 삶을 되짚어볼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소감을 밝혔다.

▲ 보물 제1709호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본 용연과 버드나무. ⓒ 손성배

정조가 기술자들에게 ‘불취무귀’를 외친 동장대를 지나 방화수류정에 올랐다. 이곳에서 화성을 관통하는 수원천을 따라 걸으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융릉이 나온다. 방화수류정 인근에는 화홍문이 있다. 1922년 대홍수로 인해 지붕 전체가 유실됐으나 1933년 수원시민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복구했다. 김 교수는 ‘근대 최초의 크라우드펀딩’이었다고 평가한다.

화성의 두 번째 용도는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왜군을 막는 전초기지였다. 정조는 “아름다움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며 수원천변에 줄지어 있던 버드나무 잎 모양으로 성곽을 쌓으라고 명했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 성의 방어력을 높였다. 다산은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제안한 옹성을 화성 4개 문에 모두 적용했다.

옹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단거리 개인화기에 속수무책으로 성이 함락되자 자구책으로 내놓은 군사 기술이다. 성문 앞을 감싸는 성벽을 쌓아 성문 가까이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축 양식이다.

▲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가 화성 4개 문의 공사실명제를 설명하고 있다. ⓒ 손성배

기술자의 이름을 새긴 공사실명제

화성 톺아보기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장안문이었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 가장 크고 숭례문보다도 크다. 이곳에는 성문을 건축한 기술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다산은 공사실명제를 통해 기술자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한편,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정조는 기술자들에게 정3품 당상관 이상만 쓸 수 있는 토끼털 귀마개와 털모자를 하사했다.

자신을 역사학자라고 소개한 오장환(54)씨는 박석무 선생을 만나기 위해 이번 동행에 따라나섰다.

“다산의 애민 사상은 지금에 와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화성은 지금까지 괄시를 받아왔어요.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문화적인 특성을 살려서 수원 지역이 재도약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복격양(鼓腹擊壤). 백성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임금의 덕을 찬양하는 ‘걱정 없는 세상’을 다산은 꿈꿨다. 다산은 자애로운 군주 아래서 제 뜻을 폈다. 반대파의 공격으로 18년 유배생활을 했지만 당시 집필한 저서는 후대 연구자들의 본이 됐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은 지금까지 허울 좋은 수사였다. 그러나 다산은 아니었다. 180년 전 떠난 다산에게 여전히 많은 이가 관심을 두는 이유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대산농촌재단과 함께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이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 : 문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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